동아시아 역사

신라와 왜의 접촉 기록 - 상편 [실성에서 애장왕까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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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

402,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405,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경주 명활성 전경경주 명활성 전경


407,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여름 6월에 다시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백 명을 잡아갔다.

408,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 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라고 들었습니다. 황차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 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책략 중에는 상책입니다.”


미사품 열전 만화미사품 열전 만화

(출처 : 맘대로 써보는 미사품 열전만화)


415,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눌지

418, 가을에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왔다.

431, 왜병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명활성을 포위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갔다.

440,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가축을 약탈해갔다. 여름 6월에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하였다.


444,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려 하자 측근들이


"병가의 말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하였으니, 왕은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하였다. 왕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적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하였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미사흔을 구한 박제상의 여정미사흔을 구한 박제상의 여정

(출처 :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의 혼이 서린 치산서원)


459,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동원하여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이어서 월성을 포위하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왕성이 무너지지 않자 적은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군사를 보내 적을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바다 어구까지 추격하였다. 적병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462,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신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 왜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신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 왜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출처 :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의 혼이 서린 치산서원)


463,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벌지와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대승하였다. 왜인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은 변경의 두 곳에 성을 쌓았다.

476,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다. 왕이 장군 덕지를 시켜 그들을 공격토록 하였다. 그는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477,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다섯 길로 들어와 침범했으나 결국은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다.


자비

479, 왜병이 침략. 명활성明活城을 쌓고 들어가 피하니 왜병이 양주梁州의 두 성을 둘러쌌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감


신라 양주. 조선시대엔 양산군梁山郡으로 불림신라 양주. 조선시대엔 양산군梁山郡으로 불림


지금의 양산시지금의 양산시


소지

482,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486,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497,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500,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신라 소지왕신라 소지왕


문무

663, 용삭 3년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에 웅거하면서 왜에게 병력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 인문, 천존, 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노련한 병사와 의욕만 앞선 병사의 대결. 왜의 대패노련한 병사와 의욕만 앞선 병사의 대결. 왜의 대패


백강 전투에서 대패한 왜백강 전투에서 대패한 왜


670,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고치고, ‘해돋는 곳과 가까이 있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애장

802, 균정에게 대아찬의 위를 주고, 거짓 왕자로 꾸며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이 이를 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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