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신라와 왜의 접촉 기록 - 상편 [혁거세에서 내물이사금까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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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

BC50,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감


남해

14,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자, 6부의 정병을 보내 이를 방어함


탈해

73,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함우오가 전사


지마이사금 가계도지마이사금 가계도


경주의 지마왕릉경주의 지마왕릉

(출처 : doopedia)


지마

121,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함

122,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함.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함

123, 왜국과 강화함


아달라

158, 왜인이 예방함

173,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예방함


비미호 동상비미호 동상


벌휴

193, 왜인 천여 명이 큰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옴


나해

208,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를 명령


조분

232,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직접 나아가 싸웠다. 적이 흩어져 도주하자 정예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

233, 왜병이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다. 그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웠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첨해

249,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유례

287,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1천 명을 잡아 갔다.

289, 왜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

292,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일길찬 대곡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사도성으로 비정되는 흥해읍성사도성으로 비정되는 흥해읍성

(출처 : 포항시가 읍성지의 보고가 될 것인가? )


294, 여름에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하였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하였다.

295, 왜국 정벌을 꾀하지만 어려울거란 신하의 말을 듣고 중지함


기림

300년, 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흘해

312,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의 혼처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344, 왜국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345, 왜왕이 절교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3D로 복원한 신라 왕궁 13D로 복원한 신라 왕궁 1


3D로 복원한 신라 왕궁 23D로 복원한 신라 왕궁 2

(출처 : 문화유산기술연구소)


346,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왕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내물

364년,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함,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왔으나 복병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하여 도주했다. 이를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인다.


나꼼수 주진우가 오래전 이야기했던 토함산나꼼수 주진우가 오래전 이야기했던 토함산


393년,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으며,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한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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