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고구려 괴유가 백인일 가능성 검토 - 하편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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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북명이란 지명은 뭔가?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남해왕 16년 봄 2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이를 왕에게 바쳤다.


북명이란 지명은 사실 신라 본기에 딱 한 번, 고구려 본기에도 괴유와 관련되어 한 번 나온거 빼곤 나오질 않습니다. 사실 북명이란 단어 자체가 무언가를 특별히 지칭하는 게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의 단어이기 때문에 잘 나오지 않는 게 정상일지로 모르겠죠. 


고구려와 부여의 위치고구려와 부여의 위치


하나 더 생각해 봐야 할 점은, 고구려인 관점에서의 북명과 신라인 관점에서의 북명은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일단 북명이란 단어가 어느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라는 점, 신라와 고구려의 관점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김부식이 말한 위치가 분명하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는 삼국시대 지명인 북명향과 북명산은 삼국 당시에 주목받지 못한 외딴 지명인 게 확실합니다.


결국, 북명에서 왔다는 괴유는 그저 북쪽 어딘가에서 왔다는 뜻이 되겠고, 마로는 골짜기에서 왔다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나 몸에 털이 붉은 백인이었다는 점으로도 추론이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로가 사용했다는 긴 창은 동이전을 참고해 보면 왜에서부터 북방 민족까지 모두 사용하는 것인지라 어느 지역의 특징이라고 말하긴 힘듭니다. 다만 동이전엔 긴창을 주로 사용한다 안 한다는 차이와 긴창이 많다와 적다의 차이가 있기에 이런 것들을 걸러내어 추론한다면 괴유의 조상이 어느 지역에 정착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스칼렛 요한슨스칼렛 요한슨


3. 부여에서 온 괴유와 마로?


새롭게 투항해 왔기에 공을 세우기 위해 앞장섰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4년 겨울 12월,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 옆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밥을 짓게 되어 모든 군사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이었는데, 제 누이가 잃었다가 이제 왕께서 얻었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왕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주었다. 왕이 이물림에 도착하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 하니 제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디카프리오 어린 시절디카프리오 어린 시절


여러 차례에 걸쳐 부여 공격에 나선 대무신왕에게 부여의 세력들이 속속 투항합니다. 


비류수 근처의 세력

: 負鼎 - 싸웠지만 졌다는 뜻


이물림 근처의 세력

: 이물림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날카로운 물건들의 숲"

: 매복한 병사들이라는 뜻으로 대무신왕이 이 매복병들을 제압하고 합류시켰다는 뜻?

: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는 부분에서 이물림 근처의 세력은 부여의 왕족이거나 다른 부여 동맹국의 정규병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과 옥새 같은 귀한 물건이 나올 가능성이 있을지,


북명, 적곡 사람의 투항. 


이게 모두 12월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다음 해엔.... 


부여와 전면전을 펼쳐 대소왕의 목을 베지만 부정씨와 신마 거루가 도망.. 즉 부여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세력이 다시금 배신하는 형태로 그려지고 이물림에 이르러선 병사들이 밥이 없어 굶주립니다. 대무신왕은 자기 잘못이라며 나라 사람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서한 시기 부정 관련 유물서한 시기 부정 관련 유물

(출처 : 古玩鉴赏知识-陶器(11-8)-彩绘陶)


즉, 대무신왕 4년에 투항한 세력인 비류수 근처의 부정씨와 이물림의 세력은 즉시 고구려를 다시 배반해 부여에 붙고 북명 적곡 사람은 이름이 남아 고구려를 따릅니다. 무슨 차이냐면 고구려를 끝까지 따르면 이름이 남고 끝까지 따르지 않으면 은유적 표현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고구려인 입장에선 당연한 조치입니다. 말도 안 듣고 중간에 배반한 사람들을 지면 할애해 가며 잘 남길 필요는 없는 것이죠. 


이와 같은 내용을 언급한 이유는, 당연히 괴유와 마로 때문입니다. 괴유와 마로가 부여에서 새롭게 고구려에 합류된 세력의 대표주자들이라면 이미 백인 집단은 만주 일대에서 그 이전 시기 부터 관직 생활을 해왔다는 뜻입니다. 


이상, 고딩 시절 생각했었던 망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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