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진나라를 공격한 수나라의 공격 과정 [천하 통일의 대업 달성]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 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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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황제와 신하들이 하는 일 없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을 때 양견은 진을 멸망시키기 위한 작업을 하나하나 진행했다. 진 후주가 즉위할 무렵, 양견은 대장군 한금호韓擒虎를 광주廣州 총관으로 파견하고 여강廬江(지금의 안휘성 여강현)에 진주하도록 지시했으며, 하약필賀若弼을 오주吳州(지금의 강소성 양주현) 총관으로 임명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진나라 수도를 견제하라고 명했다.


수나라 대장군 한금호수나라 대장군 한금호

(출처 : 韩擒虎)


하약필 영정. 상상도하약필 영정. 상상도 

(출처 : 隋朝名将贺若弼用兵:大张声势真假难分)


개황 8년(588) 말에는 회남행태성淮南行台省을 수춘壽春에 설치하고 차남 진왕晋王 양광楊廣을 상서령으로 삼아 진나라 토벌전의 총지휘를 맡겼다. 그리고 양광, 양준楊俊, 양소楊素를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임명하고 군사 50여 만을 동원했다.


- 양광은 육합六合

- 양준은 양양襄陽

- 양소는 영안永安(사천성 봉절현)

- 유인은劉仁恩은 강릉

- 왕세적王世積은 근춘靳春(호북성 근춘현)

- 한금호는 여주廬州(안휘성 합비시)

- 하약필은 광릉廣陵(양주시 서북)

- 연영燕榮은 동해東海(강소 연운항)에서 출병했다.


50만 대군은 동쪽으로는 동해에서, 서쪽으로는 현재 사천의 전체 장강 연안에 이르기까지 여덟 방면에서 동시에 출격해 수륙 양면으로 진나라를 대거 공격했다.


수나라의 진나라 공격 루트수나라의 진나라 공격 루트

(수나라의 진나라 공격 루트)


수나라 군대가 한발 한발 조여오자 진의 변방 장군들은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후주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왕기가 여기에 있고, 이전에 제(북제)나라와 주(북주)나라가 공격해왔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 수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들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큰소리를 쳤다.


소위 문무를 겸비했다고 자칭하던 대신 공범孔范 역시,


"장강은 천연의 요새로 예전부터 남북을 갈라놓고 있는데 수나라 군대가 어떻게 날아 건너올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분명히 변방 장군이 공을 세우려고 허위 보고한 것이 틀림없다."


라고 맞장구쳤다.


드라마속 한금호와 하약필드라마속 한금호와 하약필

(출처 : 没有交代的十大人物结局)


행군원수 양소. 양현감의 아버지행군원수 양소. 양현감의 아버지

(출처 : 杨素图册)


이처럼 위기를 알리는 변방 장수들의 보고는 무시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모두 설날 경축 준비로 바빴다. 건강建康(지금의 남경)의 10여만 군대는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고, 소마가蕭摩訶처럼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는 재능있는 장군들은 중용되지 못했다.


설날 밤, 진위 황궁에는 대낮처럼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고, 문무백관들은 산해진미가 차려진 술상에 둘러앉아 즐겼으며, 후주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시각을 다투는 군사 보고서를 개봉하지도 않고 침대 밑에 던져버렸다. 채석기采石磯와 같은 군사요지를 지키는 병사들도 모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수나라 장군 한금호韓擒虎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500명을 거느리고 밤에 채석기를 건너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진나라 군사들을 전멸시켰다.


남경 남서쪽의 군사 요충지 채석기남경 남서쪽의 군사 요충지 채석기


설날 아침, 대장군 하약필은 자욱한 안개를 틈타 장강을 몰래 건넜지만 진나라 수비군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나라군은 진이 손쓸 사이도 없이 강구江口(강소성 진강)를 점령하고 수도 건강으로 쳐들어갔다. 수나라군이 건강에 도착하자 진의 대장군 소마가와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는 공범이 나와 맞섰다.


수나라군이 먼저 집중적으로 공범의 진지를 공격하자 진나라군은 막아내지 못했고 대장군 임충任忠은 한금호에게 투항해 수나라군을 주작문朱雀門으로 안내했다. 성을 지키던 수비군이 저항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임충이 그들에게,


"나도 투항했는데 너희들이 어찌 항거하겠다고 그러느냐?"

 

라고 말리자 진나라군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도망쳤다. 각지의 진나라 군도 앞 다투어 투항했다. 경양궁景陽宮에 숨어 있던 후주와 문무백관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진나라는 이로써 멸망했다. 수나라는 남(진나라)과 북(돌궐)을 통일하고 돌궐을 견제하면서 수백 년 동안 분열과 대립, 동란으로 얼룩진 중국에 다시금 통일과 안정을 실현했다.


소마가 일러스트.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소마가 일러스트.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

(출처 : 千古第一猛将 13岁就独自单挑数万大军)


수나라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는 국경이 동남쪽으로 바다, 서쪽으로 차말且末, 북쪽으로 오원五原까지 확대되어 동서 길이가 9,300리, 남북이 1만4,815리가 되고 민가가 900만 호, 인구가 약 5,000만 명에 이르렀다. 진한秦漢의 통일 대제국에 비견될 만한 규모다. 이런 대제국 건설의 원동력으로는 물론 수나라 통치자의 공로도 있지만, 당시 여러 민족의 백성도 저마다 분열을 반대하고 통일과 안정을 갈망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대세의 흐름이었다.


출처 - 천추흥망, 수와 당나라 편, 따뜻한손, 거지엔슝, 쑹창빈, 이지연


마지막 줄을 읽어보니, 중국 학자들의 사상이 어떤가 다시금 확인 되네요. 중국 학자들의 책은 다 좋은데 저런 식으로 결론 내는 건 안 좋아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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