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제갈량 닮았다는 뜻이 칭찬인가 비난인가 [치초의 아버지 치음]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9. 19. 08:30

치사공郗司空(치음郗愔, 환온의 측근인 치초의 아버지)이 북부北府(서주자사)로 임명받았을 때, 왕황문王黃門(왕휘지王徽之)이 치사공의 집에 와서 축하를 하며 말했다.


임기응변의 장재將才(장수의 자질)가 이 사람의 특징은 아니라오.


왕황문은 몇 차례나 반복하며 뇌깔였다.

치창郗倉(치융郗融)은 형인 가빈(嘉賓, 치초의 자)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오늘 임명되셨는데 자유子猷(왕휘지)의 말은 실로 불손하군요.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가빈이 말했다.


그것은 진수陳壽가 제갈량諸葛亮을 비평했던 말이다. 남이 네 부친을 무후武侯(제갈량)에 비유하고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촉지蜀志의 진수陳壽의 평에 이런 말이 있다.


제갈량은 해마다 군사를 움직였는데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임기응변의 장재將才는 그가 득의得意(일이 뜻대로 이루어져 만족해하거나 뽐냄)로 삼던 바가 아니었으리라.


- 세설신어 下, 안길환, 명문당 350p ~ 351p

- 세설신어 배조排調(상대방을 비웃거나 놀림)편 44화.


삼국시대 촉한의 무후 제갈량삼국시대 촉한의 무후 제갈량. 지금 나 놀린거임?

(출처, 바이두 백과)


제갈량은 의문의 1패를 당했습니다. 그가 정치인으로선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촉나라의 무후로 숭상받는 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그의 군사적 재능까진 인정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었군요. 지금 이 시대에도 제갈량의 군사적인 성과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데 이는 당대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나저나, 받아 들이기 나름이군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은근히 비아냥 대는 것인데, 비아냥에 비아냥을 더하니 칭찬이 되네요.


또, 조선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세종의 아들인 문종과 세조입니다. 잠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죠.


문종이 말하기를, "이정李靖(당나라 장군)은 수양首陽보다 나을 것이 없고, 나는 아마도 제갈량諸葛亮과는 차이가 좀 날 것 같다."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제갈량은 장재將才가 부족한 사람인데, 성상께서 어찌 이에 비해 논하십니까?"


조선시대에도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선 부정적이었군요. 이런식으로 제갈량은 칭찬, 혹은 비판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ps. 다른 분들의 의견.


A1. 부인을 잘 뒀다는 점에선 칭찬이겠죠..


A2. 제갈량 능력에 대한 회의론이 생각보다 역사적 뿌리가 깊네요. 좋은 자료 잘 봤습니다. 참고로 저도 제갈량 능력 회의론자라는...요즘의 제갈량 능력 회의론자들이 주로 거론하는 문제나 소개하신 자료에 언급된 내용이다 그러고 보면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A3. 진수의 그 부분을 놓고도 반론은 오래전부터 존재한지라 말이죠...(진수 너 제갈량에게 맺힌 게 많아서 삐딱선 탄 거잖아! 라는 이야기가 진수 당대부터 있었으니까요)


A4.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했다고 뭐라는 건 500원 한 개 주고 치킨 한 마리 사오라는 거나 진배없는 소리일 텐데 말이죠.


A5. 반대로 옹정제가 자신의 최측근이자 외숙부인 퉁기야 롱코도를 숙청할 때 물었던 죄목 중 하나가 "자신을 제갈량에 비유했다.=>매우 불손하다! 어디 감히 무후하고 자신을!"이라는 괘씸죄였으니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도 있었나 봅니다. 괜히 유백온이 죽은 제갈공명에게 캐발리는 일화가 여러 개 있는 게 아니라능...


덤. 저렇게 형님 후빨해놓고서는 형 죽은 뒤 조카 죽이고 형수 묘 파헤치고 한 게 수양대군이란 게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A6. 세조는 한고조 유방도 막 까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기록의 맥락이 저 사람의 거침없음, 독특한 관점, 혹은 호방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A7. 재능은 인정할 만 하지만 결과를 떡하니 내놓은 건 아니니 마냥 좋아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네요. 세상은 모로 가도 공적을 이룩한 사람만을 기억해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