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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1905년. 일본 대학생의 합리화, 분노가 치민다

을사늑약 1905년. 일본 대학생의 합리화, 분노가 치민다 을사늑약에 대한 어느 일본 대학생의 주장입니다. 논리 자체는 일본인으로선 합리적이겠으나,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입장에선 매우 비합리적이란 생각입니다. 결과만 놓고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는 식의 논리 전개는 그 과정을 매우 깎아내리는 것이죠. 행동에 대한 결과를 논의하기보단, 결과만 놓고 결과가 파생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을사늑약 1905년을 가볍게 봐요. 해당 영상은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전체 영상을 보고 싶은데 그건 제 능력으로 어떻게 안 되니, 약 6분의 영상 링크와 거기에 나온 패널들의 발언을 텍스트로 남깁니다. (어느 일본 대학생) 저는 대학에서 역사학과를 나왔는데요. 한국과 일본은 같은 대일본제국의 일원 중 하나였..

동아시아 역사 2016.12.11

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343년, 강제 건원 원년의 일)유치공庾穉恭(유익, 庾翼)은 이전부터 중원을 회복코자 하는 뜻(북벌 정책 찬성자)을 가지고 있었으나 (큰 형) 문강文康(유량, 庾亮)이 살아 있을 때는 그 권력이 강했고, 그런 실권이 자기에게는 없었다. (둘째 형) 계견季堅(유빙, 庾冰)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전화戰禍를 꺼리고 두려워했다. 유치공은 그와 오랫동안 시비를 벌인 다음에야 겨우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형荊, 한漢 지방의 총병력을 투입하고, 군선軍船과 병거兵車를 있는 대로 총동원했으며 군단을 양양襄陽에 진주시켰다. (1) 그곳에서 치공은 막료들을 전원 집합시키고 군기軍旗와 무기 일체를 도열시킨 다음 친히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말했다. "이번에 내가 ..

동아시아 역사 2016.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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