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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 26

송태종 조광의 -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다

출처 - 용호상박의 명장들, 장개충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趙光義 -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다 976년 10월 송나라 태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조광의(이후 조경炅으로 개명)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태종이다. 당시는 북송이 건국된 지 17년밖에 안 되었기에 모든 면에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오대 때에 형성된 할거체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송의 동남지역은 전류錢鏐가 오월吳越에서 칭제하고 있었고, 진홍陈洪은 장천漳泉을 점거하였으며, 서북 지역은 북한北漢이 태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출처 : 赵光义) 북송이 단지 후주의 뒤를 이어 여섯 번째 단명 왕조가 될 것인가 여부가 북송 통치자 앞에 놓여 있었다. 송 태종은 '국가 창업에 노력하고, 정치에 열중하여 천하의 정무에 게으름 없이 몸소 임했던' 태..

동아시아 역사 2017.07.20

대가야의 성립과 명칭 정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령현 건치연혁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최치원의 석리정전에 이르길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夷毗訶에게 감응하여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 옛 기록의 '여섯 알 전설'과 함께 모두 허황해 믿을 수 없다. 또 석순응전은 대가야국의 월광태자는 정견正見의 10대손인데, 아버지는 이뇌왕으로서 신라에 청혼해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으며,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참고할 수 없다. 삼국유사 기이 가락국기에 실린 설화는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설화인데, 위의 설화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설화임을..

동아시아 역사 2017.07.19

조선시대 인쇄술 - 자치통감, 약천집, 사역원, 주자도감, 첩해신어 등

조선의 개국 이후 직면한 사회, 경제적 변화와 혼란을 해결하고, 새로운 성리학적 사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문제는 책의 인쇄와 보급이었다. 조선은 고려의 인쇄술을 계승하였으나, 태종대에 이르러 문물과 제도가 정비되자 주자 업무를 관장하는 자주소를 설치하고, 1403년 수개월에 걸쳐 동활자인 계미자를 주조하였다. 이후 대략 20년 간격으로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지는데, 1420년에는 경자자가 1434년에는 갑인자甲寅字가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소형小型의 동활자인 갑진자甲辰字와 대중형大中型의 계축자癸丑字를 비롯하여 병자자丙子字, 경진자庚辰字, 한구자韓構字, 정리자整理字 등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자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조선은 교서관校書館, 주자소鑄字所, 규장각奎章閣을 비롯하여 관상감觀象..

동아시아 역사 2017.07.17

이덕일 국정역사교과서 3가지 비판 내용

이덕일 국정역사교과서 3가지 비판 내용 위 동영상에서 나온 이덕일의 발언 중 일부를 발췌합니다.이덕일은 고대사 부분에서 핵심적으로 본 3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1. 한사군 한반도설국정역사교과서 저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어디로 기록했느냐. (중국에서 그린 한사군 영역.우리나라 학계에선 이 그림처럼 한사군을 비정하지 않는다.오히려 한사군은 행정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으로 추정함) 2.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국정역사교과서 저자들이 초기 기록을 믿고 있느냐, 안 믿고 있느냐. 신라는 내물왕(356~402)이 건국했다고 적었다. 신라 건국자에서 내물왕 사이의 기록을 적지 않았으니, 국정역사교과서 저자들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백제는 고이왕(234~286), 근초고왕(346~375)만 적혀있..

동아시아 역사 2017.07.16

굴원의 생애와 시대 배경 下

굴원의 생애와 시대 배경 下 춘추 전국시대는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는 옛 씨족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할 때에 굴원은 입조하여 처음에는 초 회왕楚懷王(BC 329~BC 299)과는 관계가 돈독하여 국사를 원만하게 도모하는 등 신임이 두터워 좌도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전국시대 군주들은 새로운 정치 환경 아래에서 자신의 부국강병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필요하였다. 그 당시는 진秦, 초楚, 제齊 나라가 각각 강대국으로서 서로 중국을 통일하여 패자가 되려고 쟁투를 벌이는 때였다. 이러한 시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 하기도 하고 전..

동아시아 역사 2017.07.15

굴원의 생애와 시대 배경 上

굴원의 생애와 시대 배경 上 굴원屈原은 중국 고대 초楚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삼려대부三閭大夫(전국시대 초나라의 관명. 왕족인 소씨昭, 굴씨屈, 경씨景의 세 집안의 계보와 인재 등용을 맡음)였다, 이름은 평平이고 자는 원原이다. 선왕宣王 27년(?) 제귀稊歸에서 태어나 경양왕頃襄王 14년 골나강汨羅江에서 조용하게 이 세상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는 60세 전으로 추정된다.그는 학식이 높고 의지가 깊으며, 정치에 밝고 문장文辭에 능숙하였다.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이소離騷에서 고양제의 후손이여! 나의 선친은 자字가 백용이네(帝高陽之苗裔兮, 朕皇考曰伯庸)로 자술하고 있어 백용伯庸을 아버지로 유추하여 볼 수 있다. 아버지 백용伯庸은 아들 굴원屈原을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이 밖에 여수女嬃라는 누님이 있어 너무 강직..

동아시아 역사 2017.07.14

조선 시대 한글 활자 인쇄본 (책의 판식과 명칭)

조선 시대 한글 활자인쇄 (1) 세종은 한글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이를 인쇄하기 위해 한글 활자를 만들었다. 한글 활자는 금속활자 외에 목활자로도 만들어졌으며, 이들 활자는 한문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 등을 간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17세기 후반~18세기에 제작되어 사용된 한글 활자 실물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초기 한글 활자로 찍어낸 책으로는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이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을해자 한글 활자, 경서자 한글 활자, 무신자 한글 활자 등 약 20여 종의 한글 활자가 만들어져 함께 사용되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금속활자본/한글 활자세종이 소현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한 석보상절의 각 구절에 석가모니의 공력을 찬양하여 손수 우리말로 악장체..

동아시아 역사 2017.07.13

동양의 인쇄 문화와 중국, 일본의 인쇄 역사

동양의 인쇄문화 중국의 채륜蔡倫에 의해 종이가 개량되고 보급되면서, 탑본기술로부터 목판인쇄가 시작되었다. 11세기에 들어 중국의 필승畢昇이 흙을 구워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로 인쇄를 시도하였고, 고려에서는 금속활자를 창안하여 직지를 인쇄하였다. 일본에서는 770년에 목판으로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를 인쇄하였으며, 중원지방의 목판인쇄기술이 서북지역인 돈황의 위구르인들에게 전파되어 각종 불경의 번역과 판각 불화 인쇄에 응용되었다. 한편 기원전부터 동서양 교류의 중심이 되었던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의 종이가 서양에 전파된 것처럼 동양의 인쇄, 출판문화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당시 각국의 인쇄 관련 자료들을 통해 그 가능성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 중국의 활자제작에 관..

동아시아 역사 2017.07.12

청주의 백제, 신라 고분군과 정북동 토성 제작 과정

청주 신봉동 고분군 신봉동 고분군은 청도 도심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무심천 서쪽 낮은 구릉에 있다. 해발 100m의 명심산明心山 정상부와 사방으로 뻗은 산기슭을 따라 분포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움무덤土壙墓 등 다양한 무덤을 조사하였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철제 무기, 마구류, 장신구류 등이며, 주로 5세기 전후 전투에서 희생된 군인이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1982년 3월 고분의 존재가 알려진 뒤 1차 발굴조사가 있었다. 1987년에는 고분군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7차례 발굴조사를 하여 돌방무덤 4기와 돌덧널무덤 3기, 덧널무덤, 널무덤, 움무덤 등 320여 기, 구덩유구 49기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2013년 7차 조사에서는 돌방무덤 가..

동아시아 역사 2017.07.10

우리민족 2~3세기 여러 나라들과 삼한

2~3세기의 여러 나라 2~3세기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습니다. 가장 북쪽에는 부여, 압록강 유역에는 고구려가 이미 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한강 유역과 서쪽 바다 근처 평야 지대에는 마한, 남쪽 바다 근처에는 변한, 동쪽 바다 근처 산간지역에는 진한이 있었는데, 모두 합해 삼한이라고 부릅니다. 삼한은 지금 시와 군 크기와 비슷한 작은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밖에 한반도 동해안의 북쪽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가 있었습니다. 삼한, 옥저, 동예 등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왕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행정, 세금, 군대 등의 제도를 잘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여러 나라는 서로 경쟁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삼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옛 기록을 ..

동아시아 역사 2017.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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