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2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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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고구려高句麗

위진남북조 시대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형성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고구려이다. 이는 1세기부터 2세기 동안 요동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쳐 설치된 요동군, 현도군 등 한제국의 파견기관과 직접 접촉하면서 투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요동에서 반쯤 독립한 한인인 공손씨 세력과 화북을 제압한 위나라와의 접촉, 투쟁에서도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238년 위나라(위진남북조의 위를 말함)에 멸망한 공손씨의 반독립국에는 184년 황건의 대란으로 시작된 화북의 혼란을 피해 많은 한민족이 유입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당시의 일류 지식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도의 중국 문명이 요동지방에 현실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은 이 무렵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위나라와의 투쟁 과정에서 244년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압록강 중류에 위치한 수도인 환도를 함락당하는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진남북조 시대 4세기에 접어들어 서진왕조 내부에서 붕괴가 일어나고 북방계 이민족이 화북을 대혼란으로 몰아넣기 시작하자 고구려는 한제국 이래 중국 정부의 지방 말단 기관이었던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을 연달아 함락시키고, 334년에는 낙랑군의 옛터인 평양성을 증축하여 한반도 북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요동지방에는 선비족 가운데 모용부의 연나라가 성립함으로써 고구려와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과장된 한사군 지도1[고구려와 화북 국가] 과장된 한사군 지도1

(한사군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음)


연나라의 기초를 마련한 모용외(269~333)는 화북의 대혼란을 피해 요동지방으로 흘러들어온 한인을 두둔하고, 그들의 출신지에 대응하여 4개의 군을 둠과 동시에 군, 현 장관에는 그들 가운데 명망 있는 자를 임명했다.


그리고 한인 가운데에서 현명한 인재를 발탁하여 정치의 실권을 위임했으므로 모용외는 중국 예교禮敎의 보호자로 평가되어, 한민족은 이를 의지하여 요동으로 피난해 갔다.

이 위진남북조 시대가 중국 문명이 이 지방에 뿌리내리는 제2의 시대였으며, 이로써 요동지방에 호족풍, 한족풍 체제가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모용외의 자손은 이런 방침을 이어받아 마침내 그 기초 위에 화북을 제패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연(337~370)은 요하지방에서 수도를 계(지금의 북경)로, 나아가 업(지금의 하북성 임장)으로 뻗어 나갔고, 한때 저족의 전진(351~394)에 병합되었지만, 이윽고 일족인 모용수가 하북성 정현의 중산을 수도로 하는 후연(384~407)을 부활시켰다. 4세기 후반에는 이 모용씨의 연국이 화북의 동쪽 반을 제압하고 있었다.


과장된 한사군 지도2[고구려와 화북 국가] 과장된 한사군 지도2

(한반도 전역에 영향을 미친 것은 고조선 이후의 토착 세력임)


그리고 후연이 선비 탁발부가 세운 북위에 의해 붕괴한 후, 요하 주변에 한인을 군주로 하는 북연(409~438)이 한때 부활할 수 있었던 것도 요동 일원과 옛 연나라 내부에 한인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던 결과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고구려는 이처럼 중국 문명을 받아들인 선비 모용부가 호족풍, 한족풍 국가를 만들어 내는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았고, 또 그 압력을 정면으로 받은 결과 선진적인 중국 문명을 받아들여 강력한 국가를 이룩하고자 했다.


373년 일찌감치 고구려는 율령을 반포하였는데 그 율령이란 서진의 율령을 모범으로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점차 국가체제를 정비한 고구려는 5세기에 전성기에 맞이하고 한반도 남부에 압력을 가하여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빼앗고 백제를 한반도 서남쪽 구석으로 밀어 넣게 된다.


조위의 고구려 공략, 수도 함락[고구려와 화북 국가] 조위의 고구려 공략, 수도 함락


이리하여 고구려는 당시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 신라 및 왜국과 관계 깊은 임나에 그 영향력을 강화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본토에서 남북으로 대립하고 있던 남조와 북조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꾀하면 각기 사절을 파견하고 중국으로부터 인정받은 권위를 이용하여 독립을 유지해 갔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남만주에서 한반도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실력을 키워 나갔고, 남북조를 통합한 강대한 수제국과 대등하게 싸움을 펼칠 정도로까지 성장하였다. 한편 고구려 벽화에 보이듯 고구려의 문화는 중국 문명을 받아들여 고도의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이민족 간에 국가형성과 문명화를 성공시킨 선구적인 한 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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