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명나라 장거정이 제거한 하심은, 취화당과 공산주의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19. 10:00
반응형

명나라 장거정이 제거한 하심은, 취화당과 공산주의


취화당 하심은 명나라 공산주의[명나라 취화당] 하심은의 공산주의 사상


취화당이 설립된 것은 하심은이 과거를 포기한 1546(명나라 세종 주후총 시기)년이고, 해체된 것은 1559년이니 약 십 년 정도 유지된 셈이다.


결국 '황목은량皇木銀兩(궁정을 짓기 위해 거둔 조세와 부역)'이라는 특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조세 저항의 과정에서 몇몇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싸우다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써 (장거정을 포함한) 지방관들은 이를 빌미로 모든 죄를 하심은에게 뒤집어씌우고 체포하여 교수형을 내렸다. 하지만 후에 다른 사람들의 구제 활동으로 인해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일생은 황야를 떠돌며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의 연속이 되었다. 왕지원王之垣의 역사록歷仕錄에 "각 성에서 매년 그 행적을 샅샅이 뒤졌으나 잡지 못하여 책으로 기록해두었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체포되어 죽기까지 거의 20년에 달하는 망명 생활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하심은의 죽음에 대해 설이 분분한데, 대게는 명나라의 정치가 장거정과 연관되어 있다.


1. 추원표, 양부산전

(하심은)이 돌아가 두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그곳에 초막을 지었다. 기한이 채 되지 않았는데 남안南安 파총把摠 주심학朱心學이 수배령을 내려 그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매질했다.

순무巡撫 왕이릉王夷陵이 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그를 죽이려 들어, 곧 사정없는 매질로 죽였다.


2. 황종희, 명유학안(태주학안서)

강릉(장거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어사 부응정傅應禎과 유대련劉臺連이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는데 모두 길안 사람이었다. 강릉이 그로 인해 길안 사람을 원수같이 여겼다.


부응정, 하심은을 증오하다[취화당과 공산주의] 부응정, 하심은을 증오하다


심은이 이전에 계략으로 재상에서 물러나게 한 일이 있었으므로 강릉의 마음이 더욱 잠잠할 수가 없었다. 심은이 효감孝感에서 무리를 모아 강학을 하고 있을 때 초무楚撫 진서陳瑞에게 체포를 명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진서가 떠나자 왕지원이 그를 대신해 마침내 그를 붙잡았다.


심은이 그에게 말했다.


"공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나를 죽일 자는 장거정이다."


이윽고 옥중에서 죽었다.


3. 심덕부沈德符 만력야획편萬歷野獲編

강릉공이 친상 중인 사람에게 출사를 명하여 혜慧씨가 긍천亘天으로 출정을 나가자 여원이 그것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길수吉水 사람 나손羅巽도 목소리를 같이하며 도성에 들어가 바른 주장을 고수했다. 강릉은 크게 노하여 그곳 지방관에게 그들을 물색하라고 명했다.

당시 모든 관리가 그를 찾고 있던 터였다. 적요適妖 사람 증광曾光이 말썽을 일으키자 양여원과 나손 두 사람을 연루시켜 말하기를 이들이 증광을 따라 반란에 가담했다고 하였다. 여원이 먼저 잡혀갔고 모진 고문으로 죽었다.


4. 경정력耿定力, 호시중의전기胡時中義田記

융경 隆慶 신미辛未년을 넘기고도 진사에 합격하지 못하여 강릉 문을 나갔다.


강릉(명나라 정치인 장거정)이 심은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람됨은 정말 훌륭하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


강릉의 말투와 안색을 보니 증오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사묘巳卯년에 이르러 심은이 변을 당한 것은 왕이릉이 한 것이지 강릉의 뜻이 아니었다.


만력야획편[중국 역사서 만력야획편]


5. 왕세정, 사료후집史料後集

하심은은 강호를 떠돌며 큰소리를 치고 다녔지만, 세상에서 뜻을 얻을 수 있는 말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무리를 이끌고 다녔으니 향공鄕貢과 태학생을 비롯해 불량한 젊은이들 어느 하나 그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얼마 후 소문이 강릉의 귀에 들어가자 강서와 호광 무안撫按에게 그를 잡으라는 밀서를 보냈고 후에 영북嶺北에서 그를 잡았다.


왕지원에게 제압당했지만, 무릎 꿇기를 거부하며 말했다.


"너희들이 어찌 감히 나를 죽이려 드는 것이며, 또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나를 죽일 자는 장 아무개(명나라 재상 장거정)다."


건장한 포졸을 골라 곤장 백여 대를 쳤으나 우는 척할 뿐이었다.

옥에 가두자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술과 음식을 넣어주었지만 역시 일소에 부칠 뿐이었다. 그중에는 금을 주는 자도 수십 명이나 됐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오직 한 선비가 주는 금은 받았으니 그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맺은 인연을 생각해 받아두겠네"


라고 하였고, 이윽고 죽었다.


명나라 거장 장거정[명나라 거장 장거정] 개혁과 만력제로 유명한 정치인


6. 왕지원, 역사록

하심은의 이름은 양여원이며 강서 영풍현 사람이다. 황목은량을 기만한 죄로 귀주에 유배되었으나 동료들과 함께 각 성으로 달아났다. 효감현에 출몰하며 무리를 이끌고 강학을 명목으로 마을을 교란했다.


만력 7년(1579), 신점新店 파총 주심학이 기문현祁門縣에서 그를 체포했다. 나는 안찰사按察司의 후렴사候廉使에게 조사를 의뢰했고 관련자들을 물색해 심문했다. 본 죄인은 감옥에서 병을 앓다가 죽었다.


7. 왕사정, 지북우담

어사 조숭선趙崇善이라는 자가 사적인 원한으로 선공(왕지원)이 강릉에게 아첨하기 위해 심은을 죽였다고 탄핵했다. 하지만 추정컨대 심은이 강학했을 때, 증조부께서는 오랜 기간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재직하며 양친을 모시고 집에 계신 것으로 여겨진다.

위의 명, 청 학자들이 수백 년 후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극작가 입센이 만들어낸 '견실한 다수자'라는 말을 이해했더라면 하심은을 죽인 원흉을 찾기 위해 그렇게 애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누구에게, 어떻게 죽었건 간에 분명한 사실은 만력 황제나 장거정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아무 생각 없이 '의용군'을 자처한 이들이 그를 형장에 보냈다는 것이다. 하심은의 죽음은 다시 말해 이들 '견실한 다수자' 때문이었다.

...

...

...

요컨대 도대체 누가 하심은의 관에 마지막 못질을 했느냐는 이제 알 길도 없고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다만 입센이 던진 그 어휘가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던져줄 뿐이다.


드라마 속 하심은[중국 사극 속 하심은]


ps1. 하심은(명나라 사상가, 1517 ~ 1579)에 대해서 - 유교넷 : 하심은何心隱 [클릭]


ps. 하심은의 기록을 보면 취화당은 경제적으로 다음과 같이 살림을 꾸립니다.


1. 열두 명이 사계절에 양식을 총관장, 스물네 명이 여덟 절기마다 양식을 독촉, 일흔두 명이 각각 시기를 나누어 양식을 거둠.


2. 각 시기가 끝나면 여덟 절기마다 양식을 독촉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납부. 여덟 절기가 끝나면 사계절 양식을 관장하는 사람들에게 납부.


3. 사계절이 끝나면 유양維養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전하여 솔양率養의 지시를 기다림.


이런 유형 때문에 공산주의의 선구자라 불립니다.


하심은집 앞면[하심은집 앞면]


하심은집 뒷면[하심은집 뒷면]


출처 - 중국 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

명나라 장거정이 제거한 하심은, 취화당과 공산주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