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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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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9월 초1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아침 8시쯤 몰운대를 지나자, 갑자기 동풍이 일고 파도가 넘놀아 간신히 배를 지탱하였다. 화준구미花樽仇未에 이르러 왜의 큰 배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의 큰 배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서 왜의 큰 배 아홉 척을 만났다.


부산포해전, 일제시대 다대포 객사부산포해전, 일제시대 다대포 객사


절영도에 이르니 왜의 큰 배 두 척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어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두들겨 부쉈다. 배에 가득 실린 왜의 물건과 무기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왜적들이 우리 기세를 바라보고 산으로 도망가서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다. (부산포해전 대승의 시작 시기)


절영도 안팎을 샅샅이 뒤져 봤으나 적의 자취는 없었다. 작은 배를 부산 앞바다로 보내어 적선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약 5백여 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언덕 아래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고, 왜의 선봉 큰 배 네 척이 멀리 초량목으로 마중 나올 거라 했다. (부산포해전에서 약 400여척을 격파함)


곧 이억기 등과 의논하기를, 우리 군사의 위세를 가지고 지금 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적이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생길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 싸움을 독려하는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하였다.


부산포해전, 부산포 일대부산포해전, 부산포 일대


우부장 녹도 만호 정운, 거북선 돌격장 군관 이언량, 전부장 방답 첨사 이순신, 중위장 순천 부사 권준, 좌부장 낙안 군사 신호 등이 앞서 나아가 적의 선봉 큰 배 네 척을 두드려 부수고 불살랐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헤엄쳐 육지로 올라갔다. 뒤따르던 우리 편 여러 배는 이때를 타서 기를 휘날리고 북을 치면서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였다.


진성 동쪽에 있는 산에서 한 5리쯤 되는 언덕 밑까지 세 군데에 걸쳐 배가 큰 것, 중간 것, 작은 것을 아울러 대략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부산포해전, 이때 절반 가량 부순 것으로 추정)


적들은 우리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더니, 우리가 곧장 앞으로 쳐들어가자 배 안, 성 안, 산 위 굴속에 있다가 총과 활을 모두 챙겨서 산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여섯 군데로 나뉘어 진을 치고 우리를 내려다보며 총과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 댔다.


부산포해전, 절영도부산포해전, 충무공 이순신


편전은 우리나라 것과 같고, 때로는 큰 철환을 쏘기도 했는데 크기가 모과만 했다. 또 때로는 돌덩이를 던졌는데 크기가 주발덩이만 하였다.


여러 개가 우리 배를 맞추자, 여러 장수가 더더욱 격분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다투어 뚫고 들어갔다. 천자포, 지자포와 그 외 여러 종류의 화살, 철환 등을 일제히 쏘며 하루 내내 싸움을 벌였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적선 1백여 척을 3도의 여러 장수가 힘을 합하여 두드려 부쉈다.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과 토굴 속에 끌고 들어간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배를 깨부수기에 바빠 머리는 베지 못했던 까닭이다. (부산포해전이 대승이었다는 의미)


부산포해전, 1592년 절영도1592년 부산포해전, 4차해전


여러 전선에서 용사들을 뽑아서 육지로 올려보내 모조리 섬멸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성 안팎 6, 7군데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 중에는 말을 타고 용맹을 보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말도 없고 지원부대도 없이 경솔하게 상륙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되었다.


더구나 날도 저물어서 적의 소굴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혹시 앞뒤로 공격을 받을 염려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배를 돌렸다. 자정에 가덕도로 되돌아와 밤을 지냈다.


양산과 김해에 정박하여 있는 왜선이 차츰 제 나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요사이 몇 달 이래로 자기들의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알고 모두 부산성 안으로 모여들었다. 관사는 전부 헐어 버리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었는데 이미 그 수가 1백여 호나 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주둔지의 병력을 깨뜨릴 정도로 부산포해전은 대단했음)


성 바깥 동쪽과 서쪽 산기슭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연달아 있는 것도 거의 3백 호였는데 이것이 다 왜인들이 지은 집이었다. 그 가운데 큰 집은 층계와 벽이 마치 절간과 같으니 그 하는 짓을 생각하면 매우 분하였다.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 9월 17일

난중일기, 송찬섭,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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