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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종9. 단종과 경혜공주를 두고 사망한 문종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6. 4.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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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종9.단종과 경혜공주를 두고 사망한 문종"


1452년 음력 5월. 궁에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다. 


문종 1452년 사망1452년 5월 14일 (음력)


어린 단종과 경혜공주12세 단종과 누나 경혜공주. 현덕왕후 소생


어린 경혜공주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문종, 재위 2년만에 사망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문종은 갑자기 생을 마감한다.


문종의 갑작스런 죽음


어린 단종


세자 나이 12살. 개국 60년 만에 조선은 권력 공백 사태를 맡게 된다. 김종서대 수양대군으로 나뉜 궁은 곧 긴장감에 휩싸인다.


권력 공백 사태의 조선


권력 공백 사태


김종서와 수양대군



문종의 죽음이 불러온 비극


문종실록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신민臣民의 슬퍼함이 세종世宗의 상사喪事보다도 더하였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실록


문종실록


비록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백성들에겐 좋은 기억이 남았던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에게도 아버지 세종을 꼭 빼닮은 성군이란 이미지가 강했고, 어린 단종을 두고 세상을 떠난 안타까움이 더해졌을 겁니다.


현릉, 문종의 묘현릉, 문종의 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어린 단종 때문에 안타까움



문종을 죽음으로 몰아간 종기?


조선왕과 세자의 일과를 보면 너무나 빽빽했기에 종기는 일종의 직업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문종의 죽음 원인. 종기


조선 왕들의 종기


종기는 조선 왕들의 직업병종기 = 조선 왕들의 직업병


문종 독살설?


야사를 보면 왕이 사망할 시, 어의들이 책임을 물어 상당한 처벌을 받게 되는데, 문종 사후 어의였던 전순의는 세조의 1등 공신이었습니다.


문종 독살설


문종의 어의 전순의전순의 - 문종 때 전의감의 의관을 지냄. 세조 때 1등 공신에 오름


그러나, 정말 독살이 판을 쳤다면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빼곡한 스케줄로 인한 과로와 면역력 약화로 봐야 합니다.


전손의는 계유정난으로 출세세조 때 전손의의 출세와 계유정난으로 비롯된 오해


문종의 사망 원인


특히 문종을 힘들게 했던 건, 어머니 소헌왕후의 사망(1446년) 이후 삼년상을 마치자 아버지 세종이 사망(1450)한 것이었습니다.


소헌왕후와 세종의 사망


문종은 철저히 유교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으로 어머니, 아버지를 위한 상사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이로 인한 체력 고갈이 건강 악화의 근본적 원인이었을 겁니다.


삼년상으로 건강 악화된 문종



조선 시대 삼년상, 어떻게 치렀나?


조선시대 삼년상


유교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병이 원인이 아니라 자식이 잘못했다고 여겼습니다. 하늘의 죄인이라고도 하죠.

문종은 세자이자 왕으로 온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했습니다.


아버지 세종은 겨울에 돌아가셨는데, 추운 날씨에 잘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았습니다.


유교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 잘못


문종은 상례의 본을 보이기


추운데 밖에 나가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곡을 하고 그곳에서 여막을 짓고 삽니다.


삼년상이란삼년상. 장사를 마친 후에도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림


삼강행실도삼강행실도.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


아버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어머니 삼년상 때문에 몸이 안 좋았었는데, 삼년상을 다시 치르며 급속도로 악화한 것이죠.


순종이 거처한 여막


그래서 실제 신하들도 예법에 너무 충실하지 마시고, 몸부터 챙기라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문종은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신하들의 간곡한 권유를 거부했습니다.


"청컨대 여막에 옮겨 거처하되 기거起居하지 마시고 또 술과 밥을 조금이라도 드시옵소서", 1450년 2월 24일 문종실록


문종을 걱정하던 신하


조선시대 최고 가치 중 하나는 효도


효를 다하는 것이 최선인 문종


조선 시대 최고 가치 중 하나는 효孝였기에 문종은 효를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으며, 왕으로서 모범을 보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문종이 사망하자 신하들이 묘를 정하기 시작했는데, 유력했던 묘는 효孝였습니다.


효심 때문에 효종이 될 뻔 했던 문종


묘호 - 왕의 사후묘호 : 왕이 죽은 다음 그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호칭.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호號


효종이 아닌 문종


묘호라는 건 왕이 사망한 뒤 붙는 것으로 어느 왕도 생전에 자신의 묘호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신하들이 생전에 그 왕을 대표할 문자 하나를 고심해 선택하기 때문인데, 사후에 자신이 어떻게 불릴지 알았던 왕은 조선의 광해군, 연산군뿐입니다. (쫓겨났으니...)


광해군, 연산군의 묘호



[총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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