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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반성문 보임소경서, 사형수의 편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6. 2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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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의 태시太始 4년, 서력으로 헤아리면 기원전 93년, 부쩍 더위가 심해진 구력舊曆 5월의 어느 날 한대漢代의 으뜸가는 영주英主로 불려진 무제武帝는 태산泰山에서 산둥山東 지방까지의 성지의 순행巡幸을 함께 한 중서령中書令 사마천司馬遷은 2개월만에 수도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중서령은 중서알자령中書謁者令의 약칭이다. 알자謁者란 궁정宮廷의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리로 (현재 일본의) 궁내청宮內廳의 식부관式部官에 해당하는 관리다. 관등官等은 4백 석으로 별로 높진 않지만, 특히 미염대음(美髥大音 아름다운 수염과 큰 목소리)의 호청년(好靑年 잘 생긴 사람)이 선발되어 일했다.


상적緗積이라는 옅은 황색의 삼으로 된 큰 관을 쓰고 외겹으로 된 하얀 명주의상을 입은 수려한 모습은 궁중에서 한층 눈에 띄는 존재였다. 알자 중에서 후궁後宮의 시중을 드는 자는 중알자中謁者라고 하는데 죄를 지어 궁형宮刑에 처한 환관宦官이 지명되었다.


한나라 사마천 삽화한나라 사마천

(출처 : 바이두 이미지)


5년 전인 천한天漢 3년(98 B.C), 패장敗將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황제의 역린逆鱗을 건드려(황제의 분노를 사) 궁형에 처한 사마천은 그 재능을 살려 곧 중서알자령에 임용되었다. 대단히 제 멋대로인 전제군주이기는 했지만 많은 신하의 특징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등용한 무제의 안목과 도량은 선조인 고조高祖에 거의 뒤지지 않는다. 사마천에 대한 처우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육십 세를 넘겨 정치와 군사에 대한 정열을 잃기 시작한 무제는 정전正殿에 나아가 군신을 모아 정무를 보는 것을 슬슬 귀찮아하기 시작했고, 후정後庭에서 새로운 애비愛妃 조첩녀趙倢伃 등과 노니는 연유장宴遊場에 서류를 가져오게 해 결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때에 환관 중 황제의 비서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는 자가 천문관 겸 기록소장記錄所長의 경험을 가진 사마천 말고 누가 있을 것인가.


사마천은 일약 처형處刑전의 직책이었던 태사령太史令의 배에 달하는 이천 석의 대우를 받았다. 전과자였던 그는 뜻밖에 한 제국의 정치의 추기樞機에 참여하는 운명이 된 것이다.

장안에 귀착歸着한 지 수 일 후, 순행 중 밀린 서류정리를 끝낸 사마천은 겨우 휴가를 얻어서 일류귀족저택과 관료의 갑제甲第, 즉 관저官邸가 즐비하게 늘어선 미앙궁未央宮 궁전의 북쪽 부근에 있는 자택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한대에는 궁중에서 근무하는 관리는 5일마다 하루씩 목욕하기 위해 자택에 귀휴歸休한다는 명의名義로 휴목休沐이라고 불린 휴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기를 집필하는 사마천

(출처 : 사기 집필 중인 사마천)


푹 잠들었던 까닭에 기분이 상쾌해진 사마천은 아침 식사도 대충대충 끝내고 공부방이 돼 있는 집 밖의 객당에 들어갔다. 붓을 든 지 십여 년 만에 최근 겨우 윤곽이 잡힌 역사歷史 원고에 손을 대기 위해서이다. 세로 30cm, 폭 5mm 정도의 대나무와 나무 조각, 이른바 죽간, 목간의 표면에 까맣게 문자를 적어 넣고 철綴하여 하나로 만들어 부피가 커진 책들의 두루마리가 벽 삼면에 어지럽게 높게 쌓여있다.


자리에 앉아 무릎 앞에 놓인 벼루에 왼손에 든 물병에서 물을 부어 먹을 갈기 시작하자, 하인 노예가


집을 비우신 사이에 임소경任少卿님 한테서 온 편지입니다. 빨리 살펴보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내밀었다.


세로 30cm, 폭 10cm 정도로 된 두 장의 나뭇조각을 끈으로 묶고 매듭에 점토를 발라 봉인하고 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면面에 예서隸書로 쓰여 있어서 편지라기보다 10년 전 우리나라 목수였던 동량棟梁이 나뭇조각의 잘린 토막에 부본을 썼던 수판手板이라고 하는 쪽이 좋을 것 같다.


중서령 사마천 복원

(출처 : 바이두 이미지)


허리 왼쪽에 매달린 단검을 빼 끈을 잘라 떨어뜨려 문면文面에 눈을 기울인 사마천의 얼굴은 순식간에 흐려졌다. 사마천은 하인에게 답장은 곧 쓸 테니 잠시 정리해 두라고 무뚝뚝하게 명령하고 수북하게 쌓여있는 원고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임안의 서간書簡은 상당히 사마천을 불쾌하게 만든 것 같다. 이 해 12월, 황제의 시종侍從을 들면서 장안에서 서쪽으로 160Km, 지금의 봉상현鳳翔縣에 해당하는 옹雍에 있는 신사神祠에 참배하러 나갈 때까지 약 반년간의 재경在京 기간 동안 그는 결국 답장을 쓰지 않았다.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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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출처 - 이윤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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