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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 시대 후조 석호와 아들 석수의 기행 (위진 남북조 시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2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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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 시대 후조 석호와 아들 석수의 기행 (위진 남북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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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태자 석수(5호 16국 시대 후조 석호 아들)는 교만하고 음란하고 잔인했다.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을 예쁘게 화장하여 성장盛裝하게 하고는 그녀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 위에 올려놓고 빈객들과 더불어 전해가면서 이를 보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살을 삶아서 함께 먹기를 좋아하는 끔찍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남조에서 벌어졌던 일탈이 북조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 태자 석수만 이러한 기행을 즐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후조 황제 석호도 비슷했는데, 그의 경우에는 주색에 빠져서 정신없이 즐겼고, 기뻐하고 화를 내는 것에서 분별이 없었다.


후조 황제 석호는 태자 석수에게 상서에서 하는 일을 살펴보게 했는데, 관련된 것을 보고할 때마다 화를 내며,


"이렇게 적은 일을 무슨 그리 보고할 만하다는 말이냐?"


라며 소소한 일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때로 보고를 하지 않으면 또한 화를 내며,


"왜 보고를 하지 않았는가?"


라고 나무라면서 태장을 치거나 회초리를 쳤는데, 이러한 일이 한 달에 두세 번이나 되었다.


이러한 후조 황제 석호의 행동 때문에 석수는 사사롭게 중서자 이안 등에게 말했다.


"관가官家(천자인 석호를 지칭)를 마음껏 섬기기가 어려우니 내가 묵돌冒頓이 했던 일처럼 하고 싶은데 경은 나를 좇겠는가?"


여기서 묵돌이란 흉노의 2대 선우 난제묵돌欒提冒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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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묵돌은 그의 아버지를 시해하고 자립한 일이 있었다. 태자 석수의 말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들은 이안 등이 엎드려서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이해 7월에 태자 석수가 병을 핑계로 하여 일을 보지 않고 몰래 궁궐의 신하와 문무관원 500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이안의 별장에서 술을 마시면서 이안 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주에 가서 하간공을 죽이려고 하는데, 이를 쫓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목을 베겠다."


태자 석수의 동생들인 하간공 석선과 낙안공 석도는 모두 후조 황제 석호에게 총애를 받았고, 그래서 태자 석수는 그들을 원수처럼 싫어했다.


이에 사람들이 태자 석수와 함께 말을 타고 몇 리를 가다가 도망하고 흩어졌다. 이안이 머리를 조아리며 굳게 간하니 태자 석수는 술에 취해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 정씨가 이 소식을 듣고 중인中人을 파견하여 석수를 나무라자, 석수는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그런데 이때 이르러, 아들인 태자 석수가 아프다고 하여 문병하려고 행차한 후조 황제 석호는 후조의 자문을 맡고 있던 승려 불도징이 석호에게 평소 태자궁에 자주 가지 말라고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에 발걸음을 돌린 석호는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탄식했다.


"나는 천하의 주인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어찌 서로 믿지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황제 석호는 믿을 만한 여자 상서에게 명령하여 태자를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태자 석수가 그녀도 죽여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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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인해 화가 단단히 난 후조 황제 석호는 이안 등을 붙잡아서 힐문했고, 이안이 그 상황을 모두 이실직고하자, 이안 등 3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태자 석수를 동궁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면하고 태무전의 동당으로 불렀는데, 오히려 태자 석수는 조회에 나와서 사과를 하지 않고 잠시 후에 나가버렸다.


석호의 사자가 태자 석수에게,


"태자께서는 응당 중국에 조현하셔야 할 것인데, 어찌 급하게 나가십니까?"


라고 말했다. 석수가 지름길로 나가면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석호는 또다시 크게 화가 나서 석수를 폐위시켜서 서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날 밤 석수와 그의 비 장씨를 죽이고, 그의 아들과 딸 26명을 한 관에다 넣어서 묻어버리고, 그의 신하와 곁가지인 무리 200여 명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정후鄭后(석수의 생모)를 폐위시켜서 동해태비로 삼았다.


이 사건은 보기에 따라서는 단순하게 부자간의 권력 투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자체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기행이라고 보아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후조의 석호, 석수 부자의 행동은 남조의 여러 황제가 벌였던 기행과 별 차이가 없다.


출처 :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 권중달, 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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