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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 왕계의 불합리성, [왕가 혈연 복원, 맺음말]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3. 28.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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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왕가 혈연 복원


- 삼국사기에 나온 표면적인 혈연 관계


버지

어머니

자식

 해모수

 유화

 동명성왕

 동명성왕

 예씨

 유리명왕

 유리명왕

 송양의 딸

 대무신왕

 

 도절

 

 해명

 

 여진

 

 민중왕

 

 재사

 대무신왕

 갈사국 왕녀

 호동

 

 

 모본왕

 재사

 부여 태후

 대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신대왕

 

 고국천왕

 

 발기

 

 산상왕

  계수


-복원한 왕가 혈연-


버지

어머니

자식

 해모수

 유화

 동명성왕

 동명성왕

 예씨

 유리명왕

 유리명왕

 송양의 딸

 대무신왕 도절

 

 해명

 

 여진

 

 재사

 여진  대무신왕
  민중왕

 대무신왕

 갈사국 왕녀

 호동

 

 모본왕

 재사

 부여 태후

 대조대왕

 대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고국천왕

 고국천

 

 발기

 

 계수

 차대왕 아들

 

 산상왕


ⅴ. 탈락된 인물들에 대한 소고


고구려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구려 왕은 왕 중의 왕인 태왕이고 그 시조인 추모왕은 바로 하늘의 직계 후손이다. 그리고 고구려 사람들은 하늘의 아들에게 지배받는 진정한 천국의 국민인 것이다. 그런 고구려 태왕들은 초기에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왕위에 올라있었으며 그 아들들도 물론 그러했다.


정난의변으로 황제가 된 주체. 영락제정난의변으로 황제가 된 주체. 영락제


그 아들들도 조작이 가해져 아버지가 아닌 자가 아버지로 기록되고 손자가 아들로 기록되며 자신들의 출생조차도 왜곡되었다. 더군다나 거기서 빠져버린, 삭제된 인물들은 왜 삭제되었나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막중한 비중을 차지했기에 기록에서 삭제되는 극단적인 조치를 당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


동명성왕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민중왕 - 모본왕 - 대조대왕 - 차대왕 - 신대왕 - 고국천왕 - 산상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왕계는 10대 13세손이다. 그러나 위에서 복원한 바를 따르면, 적어도 12대 17세손까진 가능하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17세손과 같은 숫자다.


사서에 탈락한 왕들은 왜 탈락하였을까. 그 문제는 역시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문제일 뿐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탈락한 왕들은 고구려 지도층 간의 이해관계의 성립으로 기록에서 탈락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비상식적인 왕계 혈연이 만들어졌다. 하나의 조작으로 여러 개의 조작이 가능해졌고 한 시대의 조작은 나이를 줄이는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다른 한 시대에선 나이를 늘이는 형태로 조작이 가해진다.


탈락한 왕들.


합천군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세조 어진합천군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세조 어진


이들은 실제로 왕이었을지도 모르고 지방 시골의 농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쨌건 고구려 내부의 승자에게 미움을 받아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아니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지 않은 대가일까?


아들을 아들로 기록해 주지 않고 손자를 손자로 기록해 주지 않았다. 죽었음에도 존재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죽어서도 기록되지 못한 고구려의 인물들. 그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1. 대무신왕과 고국천왕의 아버지

유리명왕이 서기 23년에 태어났다면 재위 33년 되는 해엔 55세로 노년을 대비하며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다. 재위 33년에 죽은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11살 무휼을 태자로 삼는다.


그런데 왜 무휼은 나이를 줄이는 형태로 조작이 가해졌을까. 오히려 나이를 20년은 늘렸다면 자연스러운 부자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무휼에겐 두 명의 형이 있었다고 적혀야 하며 송씨가 낳은 아들이라고 조작되어야 했다. 그래서 무모하게 나이가 줄어들었다. 실제로 유리명왕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나이를 줄여가며 유리명왕과 송씨에 대한 연관성을 끼워 맞춘 것이 아닐까?


정원군. 능양군 인조의 아버지정원군. 능양군 인조의 아버지


고국천왕은 신대왕의 아들이다. 그러나 나이 차이를 보면 고국천왕은 신대왕의 손자뻘이다. 혹시 신대왕의 늦둥이로 고국천왕을 낳았을진 모르지만, 고국천왕에겐 최대 3명의 아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약 70세 이상의 나이 차이를 보이는 두 사람 사이엔 한 명의 사람이 더 있다. 그가 실제로 왕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들을 빼앗긴 이 두 사람은 누구일까? 무휼의 아버지는 유리명왕과 비슷한 나이의 인물일 것이다. 혹, 사서에서 탈락한 유리명왕의 동생은 아닐까?


동생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고 동생의 이름을 삭제시키면서까지 조작을 하려 했던 것일까? 먼 훗날의 사람들이 유리명왕의 동생 이름을 삭제했을까? 무휼과 남무의 아버지는 출신이 너무나도 미천한 사람들일까? 유리명왕과 신대왕은 능력만 보고 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는데 훗날의 왕족이 부끄러워 조작한 것은 아닐까?


달의연인 속 정종달의연인 속 정종


무휼과 남무의 아버지가 누구이건 그는 존재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단순한 이유에서다. 바로 천손의 확실한 계통 성립에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2. 산상왕의 아버지

산상왕의 휘는 연우다. 삼국사기엔 대조대왕의 증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막근, 막덕, 수성이란 세 사람 중에 누가 할아버지일까? 대조대왕이 증손인 것은 산상왕 연우는 원래 왕족이었다는 뜻이다. 무휼과 남무는 출신이 확실하게 왕족이다는 보장이 없기에 그 아버지를 다양한 사람들로 추정해 볼 수 있지만 연우는 다르다. 연우는 정통 왕족이다. 


헌데 연우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 삭제되었을까?


영조와 사도세자를 생각해 보자.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갇힌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난립해 있지만, 정설로 삼을 만한 가설은 없다. 그러나 갇힌 이유에 대해선 영조의 미움과 오해, 분노, 실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혹시 산상왕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그렇지 않았을까?


고구려 왕족은 천손이다. 천손으로서 해선 안 될 행위를 했기에 기록에서 삭제되었을까? 산상왕은 정조처럼 아버지를 그리워해야 했다. 또 할아버지까지 그리워해야 했다. 6대 대조대왕의 증손이란 것으로만 그는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오직 그것을 내세우는 것만이 본인의 살길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러하지 못했던 것일까? 산상왕 연우의 아버지는 삭제되고 대신 신대왕의 아들로 조작이 되었다.


성공한 쿠데타. 박정희 516성공한 쿠데타. 박정희 516


ⅶ 맺음말


고구려는 화려한 역사를 가졌으며 화려한 역사를 이룩해낸 위대한 왕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위대한 면만 바라보고 환상에 젖어 들 필요는 없다. 내부의 변혁과 배신과 옹호의 역사가 고구려 내부에도 존재했다. 그건 단순히 표리부동, 야심, 복수, 배신의 테두리 안에서 시각화할 문제는 아니다.


가정이란 감성적인 기준이 만든 커다란 울타리다. 반면에 국가는 이데올로기의 집합체로 생산과 소비를 반복한다.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감성은 감성으로 그칠 뿐 이데올로기만큼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할뿐더러 국가의 시스템관 무관한 것이다. 고구려는 국가적 통합을 위한 조치로 왕통 조작을 해낸 것이다. 바로 이데올로기의 통합이었으며 국가가 성장하고 고효율 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왕위 찬탈은 국가가 한 단계 발전하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박정희 시대가 그랬고 당태종의 시대가 그랬다. 반란과 억압의 시대가 아름답게 비질 수도 있다는 말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건 지도자들의 난세이다. 난세의 배경이 왕을 초점으로 왕을 중심으로 한 몇몇 집단과 몇몇 인물들이 전부이기에 이건 일반 민중이 겪는 일반적인 혼란의 난세가 아닌 새로운 성격의 난세이다. 난세의 승자는 난세를 경험하지 않은 일반 민중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과 위치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작은 난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흩어져 있는 자료들 속에서 더 많은 기록과 증거를 찾아내 새로운 형태의 왕위 복원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두고 좀 더 객관적이며 많은 예시를 통해 더욱 합리적인 글이 나타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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