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당고의 금, 당인의 확대 (후한서 당고열전 당고의 화)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12. 11:00
반응형

당고의 금, 당인의 확대 (후한서 당고열전 당고의 화)


당인의 확대


후한서 당고열전黨錮 서, (당고의 금의 서막)

처음 환제가 여오후蠡吾侯였을 때, 감릉甘陵의 주복周福에게 학문을 배웠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환제는 주복을 발탁하여, 외조가 실권을 잃어갈 당시 실질적으로 대신에게 비길 만한 권한을 가졌던 황제의 비서직에 해당하는 상서로 임명하였다. (이후 당고의 화에 실질적 영향을 미침)


그 무렵 같은 감릉군 출신으로서 수도권 장관인 방식房植은 재조在朝의 명사로서 평판이 자자했다. (당고의 금 당시 피해)


이에 당시 향인(감릉지방 사람들)은,


"천하의 규구(規矩, 모범)는 방백무(房伯武 = 방식), 스승이라고 해서 지위를 얻은 자는 주중도(周仲道 = 주복)"


라는 노래를 퍼뜨렸다.


당고의 금, 당고의 화, 청의[당고의 금, 당그의 화, 청의의 등장]


주가와 방가의 양쪽 빈객은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각각 도당을 지어 점차 그 골을 깊게 했다. 이로 인하여 감릉지방은 남부와 북부로 분열되었다.


당인黨人의 의義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당고의 금이 시작되기 직전인 146년에 즉위한 환제. 이때는 아직 외척 양 씨의 전성시대였고 환관은 오히려 양씨에게 눌려 있던 때였다.


그 무렵부터 이미 지방 향촌 사회에는 황제와 그 측근, 즉 정부의 실권파와 연결하여 이익을 보려는 자와, 이를 반대하는 파로 분열하여 다투는 경향이 생겨났다. 주씨도 방씨도 같은 감릉 땅에서 함께 빈객을 거느린 호족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호족이 주복처럼 황제와의 개인적인 연줄이나 뇌물 등의 수단을 통해 정부의 실권파(외척, 후에는 환관, 환관이 당고의 화를 불러옴)와 연결하여 상부 권력의 보증으로 향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증대시켰을 때, 그 노선에 연결되어 있지 않거나 또는 그 연결을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여긴 다른 호족들은 전자의 노선이 가하는 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대노선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후한 청의 당고의 금[후한 당고의 금] 당고의 화로 촉발된 후한 악화


반대노선이란 일반 소농민을 포함하는 향인과 연합하여 그편에 서서 공동체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이고, 그 이데올로기인 유교 이념을 고취하고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향론은 이와 같은 호족을 천하의 규구規矩라고 인정하고 그들을 지지하여 그 선두에 세웠다.


이러한 향론은 유가적 이데올로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좁은 향촌 사회의 틀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또 향론에 의하여 부흥한 호족도 향촌 사회에 적대적인 호족의 영주화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외척, 환관 세력에 대항할 필요에서, 입장을 같이하는 다른 향촌 사회의 호족, 지식인과 연계하고 공동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이 숙생과 빈객 나아가 중앙의 태학생 등에게도 파급되어, 마침내 환관 정부와 그에 연결된 지방 호족을 비판, 공격하는 광범한 청의淸議의 터전이 형성되었다.


당고의 금, 당인의 확대 (후한서 당고열전 당고의 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