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연 4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태왕과 후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태왕과 후연 복수, 후연을 몰아붙이다광개토태왕은 거란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쪽 변경을 순시하며, 북연에게 무력시위를 하는 동시에, 고구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건재함을 알린 적이 있습니다. 이후 양국은 영토를 뺏고 뺏습니다. 변경에선 수많은 시체와 병장기들이 땅속에 묻힌 상황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장의 국면이 바뀌는 시기가 있었으니, 400년 2월에 이뤄진 후연의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기습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00리 땅을 빼앗기고 5,000여 호의 백성도 빼앗깁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신라를 거쳐 가야로 진군한 남해안 정벌군을 복귀시킨 뒤, 대대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400년 3월 ~ 401년 사이에 잃어버린 70..

동아시아 역사 2017.10.24

광개토대왕의 왜구 격퇴, 선비 정복 - 조선상고사

광개토대왕의 왜구倭寇 격퇴 왜(倭)는 일본의 본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北海道)의 아이누 족이요, 일본은 대화족(大和族)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음에 화(和)ㆍ(倭)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 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냈다. (출처 : 吉林旅行豆腐账之——集安)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日本三島 : 일본의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규슈本州ㆍ시코쿠四國ㆍ규주九州)에서 고기 잡고 사냥으로 생활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縫織)과 농작(農作)과 그 밖의 백공(百工)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

동아시아 역사 2017.04.11

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전진 멸망 이후 흥망사

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전진 멸망 이후 흥망사 중국 화북 지방, 동부의 흥망화북 동반부의 옛 전영 영내에서는 384년 모용수가 연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이윽고 중산中山(하북성 정현)을 수도로 삼고 제위에 올랐다. 이를 전연과 구별하여 후연이라고 한다. 또 모용수(전진 부견에게 중용)의 독립을 계기로 하여 옛 전연의 황제 모용위의 동생들이 장안의 동쪽과 산서성 남부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이에 호응하고자 한 모용위가 부견에게 살해당한 뒤 동생 가운데 한 명인 모용충이 황제를 칭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이 세력은 서연西燕이라 한다. 중국 화북 지방의 서연은 부견으로부터 수도 장안을 빼앗았으나 관중으로 강제 이주되어 있던 선비족이 그 세력의 주체였고 그들은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장안을 ..

동아시아 역사 2016.11.21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고구려高句麗위진남북조 시대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형성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고구려이다. 이는 1세기부터 2세기 동안 요동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쳐 설치된 요동군, 현도군 등 한제국의 파견기관과 직접 접촉하면서 투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요동에서 반쯤 독립한 한인인 공손씨 세력과 화북을 제압한 위나라와의 접촉, 투쟁에서도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238년 위나라(위진남북조의 위를 말함)에 멸망한 공손씨의 반독립국에는 184년 황건의 대란으로 시작된 화북의 혼란을 피해 많은 한민족이 유입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당시의 일류 지식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도의 중국 문명이 요동지방에 현실적으로 뿌리를 내..

동아시아 역사 2016.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