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2

진흥왕이 설치한 화랑에 대해 - 조선상고사

진흥대왕眞興大王의 화랑花郞 설치 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가 발호(跋扈)하여 사대주의파(事大主義派)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ㆍ풍속ㆍ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ㆍ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松都)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화랑파(花郞派)에 스스로 기록한 문헌인 선사(仙史)ㆍ화랑세기(花郞世紀)ㆍ선랑..

동아시아 역사 2017.05.30

화랑세기에 기록된 집단과 호칭 정리

※ 집단 명칭, 관련자, 관련 기록 마복칠성摩腹七星 아시阿時 혹은 말하기를, 법흥대왕은 칠성七成의 우두머리이며, 위화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칠성록七星錄과 보혜기宝兮記에는 모두 이등공伊登公이 없고 위화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잘 알 수 없다. 수지守知 이등伊登 태종苔宗 비량比梁 융취肜吹 법흥대왕法興大王 위화랑魏花郞 호국선護國仙 문도文徒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鄕歌를 잘 하고 속세를 떠난 유람청유을 즐겼다. 그러므로 국인들이 문도文徒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고 하였고, 설도薛徒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골품骨品이 있는 사람들은 설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의 사람들은 문도를 많이 따랐다. 서로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였다. 설도薛徒 문도 호국선護..

동아시아 역사 2017.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