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선비 2

유목생활 대신 농경생활을 택한 탁발선비 [북위]

유목생활 대신 농경생활을 택한 탁발선비 [북위] 사실 북위는 등국 초(386~) 부락 해체 때 시동위편민始同爲編民또는 개동편호皆同編戶라는 기록은 곧 탁발선비족이 지난 시절의 유목생활을 버리고 부족 조직을 해체하여 농경민화 된 편호로 개편(농경생활은 곧 한화漢化를 의미)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인 것 같다. 왜냐하면,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 태조가 후연 정벌을 마치고 대국 평성에 개선한 뒤 성곽을 축조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대군, 선무, 음관, 참합을 경계로 하는 기내를 획정했다. 그 주변의 사방사유四方四維(동, 서, 남, 북과 손巽=동남, 곤坤=서남, 진辰=동북, 건乾=서북)의 기외에는 선비계 유목민의 8부(8국)를 배치하여 각각 8부대인 1명을 임명하여 농상을 권장하고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또 명원제..

동아시아 역사 2017.11.14

북위 국사 사건, 최호와 태무제 (멸망하는 통일 왕조)

북위 국사 사건, 최호와 태무제 (멸망하는 통일 왕조) 한족 지식인들이 북위 정부에 속속 참가함에 따라 최호(북위 국사 사건의 주범)는 이 나라를 더욱더 중국적인 귀족제 국가로 개편하고자 했다. 당시의 말로 성족姓族을 분명히 하는 것, 즉 명망가로서 사회적인 평가 정도에 따라 가문의 신분적 차등을 명확히 규정하여 강남에서 행해지는 귀족제 사회의 계급 질서를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다. 고종사촌인 노현이 "그런 것을 원하는 자는 거의 없다. 아직은 시기상조다"라며 반대했으나, 태무제의 신임을 받던 최호는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작을 진행했다. 그것은 앞서 왕혜룡을 둘러싸고 불붙은 북족의 반감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마침 최호 등은 칙명을 받들어 북위의 국사를 편찬하는 중이었는데, 국사는 중국 사학의 ..

동아시아 역사 2016.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