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7

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9월 초1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아침 8시쯤 몰운대를 지나자, 갑자기 동풍이 일고 파도가 넘놀아 간신히 배를 지탱하였다. 화준구미花樽仇未에 이르러 왜의 큰 배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의 큰 배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서 왜의 큰 배 아홉 척을 만났다. 절영도에 이르니 왜의 큰 배 두 척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이어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두들겨 부쉈다. 배에 가득 실린 왜의 물건과 무기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왜적들이 우리 기세를 바라보고 산으로 도망가서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다. (부산포해전 대승의 시작 시기) 절영도 안팎..

동아시아 역사 2017.10.06

역사상 안타까운 사건. 4위 - 인조 반정, 광해군 폐출

출처 - 기억나질 않음 3. 역사상 안타까운 사건 4위 광해군이 더 오래 왕업을 이어 가지 못한 것은 더 안타까운 일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이다. 인조반정으로 폐출된 왕으로서 가족의 죽음과 조선의 굴욕을 봐야만 했던 불행한 조선의 임금이다. 광해군은 요즘과 같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가는 국제정세에서 우리에게 대처방안을 일깨워주는 선각자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이 것이 광해군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유이며, 중립 외교 정책을 견지한 군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이 위대한 왕이었다는 것은 탁월한 외교 정책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가 있으며, 외교 정책에 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먼저 광해군은 다른 조선의 왕들과는 다른..

동아시아 역사 2017.05.15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주요 인물 2

출처 - 재미로 읽는 일본역사의 비밀, 이우각, 한림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長政, くろだ ながまさ, 1568-1622)구로다 나가마사는 지금의 오오이다겐에 있는 나가죠오의 성주였다. 전국시대의 무장 구로다 요시다가의 아들이다. (출처 : 万历援朝战争始末(二十七)) 임진왜란 때는 1만 2천 명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평양성에 입성했다. 그 후 황해도에 주둔했는데, 곧 이정암이 지휘하는 의병에게 패전하여 서울로 퇴각했다. 다시 서울에서 퇴각하여 양산시 기장면 해안가에 견고한 왜성을 축성한 후 머물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 때는 우군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했다. 북상하다 충청도 직산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을 만나자 싸우지 않고 퇴각하여 기장 왜성에 들어갔다. 구로다 가문의 문서보관소인 슈게..

동아시아 역사 2017.04.14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주요 인물 1

출처 - 재미로 읽는 일본역사의 비밀, 이우각, 한림 가토 기요마사 (加藤清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1611)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아이지겐 나카무라에서 태어났다. (출처 : 人人小站~浮世绘ㄨ日本战国) 그는 히데요시 어머니의 4촌 여동생 아들이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 전공을 많이 세우고 구마모도의 구마모도죠오 성주가 되었다. 인접해있는 우도성의 성주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가 나빴다. 히데요시 사후 세기가하라의 싸움에서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승리했다. 도쿠가와 측에 반대하다 참수당한 고니시의 영토 우도를 빼앗아 구마모도의 영주가 된 뒤 현재의 구마모도죠오를 축성했다. 현재는 신격화되어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 2017.04.13

부산포해전1 다대포. 1592년 8월 28, 29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부산포해전1 다대포. 1592년 8월 28, 29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8월 28일, 경상도 육군 탐색군이 와서 말하기를, "고성, 진해, 창원 병영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이 이달 24, 5일 밤중에 전부 도망했다고 합니다.그것은 분명히 산에 올라 망보던 적들이 우리 수군을 보고, 위세에 놀라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도망한 것입니다."(1592년 임진왜란, 부산포 해전의 전조)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양산 김해 두 강으로 향하는데, 구곡포仇谷浦 포작(어부, 어민) 정말석이라는 사람이 왔다. 그가 포로 되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김해강에서 도망해 와서 말하기를, "김해강에 정박해 있는 적선이 며칠 동안에 떼를 지어 몰운대 바깥 바다로 급히 노를 저어 나가는 것으로 보아 도망..

동아시아 역사 2016.10.14

1592년 고성 당항포해전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적, 당포파왜병장]

1592년 고성 당항포해전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적] 1592년 6월 초6일,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은 남겨두었던 배를 타고 틀림없이 새벽녘에 몰래 나올 것이라 했다. 그는 그가 통솔하는 배를 거느리고 새벽에 바다 어귀로 나가 기다렸다가 나오는 왜선을 모조리 잡아 놓고 얼른 보고하였다. (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이글루스) "오늘 새벽녘(1592년 6월 5일)에 당항포 어귀에 도착해 기다리니, 과연 조금 있다가 왜선 한 척이 바다 어귀로 나왔습니다. 재빨리 돌격하였는데 그 배에 타고 있는 놈은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편 배에서 먼저 현자총통을 쏘는 한편 장편전, 철환, 질여포蒺藜砲, 대발화大發火 등을 잇달아 쏘고 던졌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도..

동아시아 역사 2016.10.13

이순신 명량대첩 - 난중일기 1597년 기록

이순신 명량대첩 - 난중일기 1597년 기록 1597년 9월 일기 초1일 : 맑다. 벽파진에 머물렀다. 초2일 : 맑다.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 1599년 3월 6일 도원수 권율에게 붙잡혀 한양에서 사형 ※ 나무위키 배설 초4일 : 아침에는 날씨가 맑더니 저녁이 되자 비가 뿌렸다. 뜸 아래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밤에는 북풍이 불었다. 초4일 : 날씨가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어서 배들이 가만히 있지 않아 온전하게 지키느라고 애를 먹었다. 초5일 : 맑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각 배를 서로 보호하기 어려웠다. 초6일 : 맑다. 바람이 조금 가라앉았으나, 추위가 스며들어서 사람을 괴롭히니, 사공들이 매우 걱정스러웠다. 초7일 : 맑다. 바람이 그치기 시작하였다. 망을 보는 일을..

동아시아 역사 2016.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