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언이 2

윤언이가 아깝지 묘청은 아깝지 않다던 단재의 글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 : 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지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원년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다.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

동아시아 역사 2017.05.27

실패한 쿠데타,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출처 -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자주국의 꿈 서경 천도파에 대한 반격은 인종의 장인이자 개경 수호 세력인 동지추밀원사 임원애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원애는 인종 10년(1132) 8월, 상소를 올렸다.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괴와 해괴한 말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속이고 미혹하는데, 한두 명의 대신들이 그들의 말을 깊이 믿어 위로 임금의 눈과 귀를 흐리니 장치 큰 환난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묘청 등을 저자에 내다 목을 베어 화의 싹을 끊도록 하소서." 하지만 인종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임원애의 상소가 있은 뒤 묘청은 인종에게 아뢰었다. "성상께서는 대화궁에 거처하셔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하실 것 같으면 근신을 보내 옥좌를 설치하고 공경해 받들기를 성..

동아시아 역사 2017.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