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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수 2

관구검을 막아낸 동천왕 기록의 의문점-조선상고사

관구검毌丘儉의 침략과 제2 환도丸都의 함락 기원 245년경에 위가 동천왕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서 수만의 군사로 침략해오므로 왕이 비류수(沸流水)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관구검을 크게 격파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고, 양맥곡(梁貊谷)까지 추격하여 또 3천여 명을 목 벴다. 왕은,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하고, 이에 여러 장수는 후방에서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왕이 몸소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는데, 관구검 등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여 전진해오므로, 왕의 군사가 퇴각하니 후군이 놀라 무너져서 드디어 참패하여 상한 군사가 1만 8천을 넘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錄原)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이 드디어 ..

동아시아 역사 2017.05.23

고구려 괴유가 백인일 가능성 검토 - 하편

그렇다면, 북명이란 지명은 뭔가? 十六年, 春二月, 人耕田, 得王印, 獻之. 남해왕 16년 봄 2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이를 왕에게 바쳤다. 북명이란 지명은 사실 신라 본기에 딱 한 번, 고구려 본기에도 괴유와 관련되어 한 번 나온거 빼곤 나오질 않습니다. 사실 북명이란 단어 자체가 무언가를 특별히 지칭하는 게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의 단어이기 때문에 잘 나오지 않는 게 정상일지로 모르겠죠. 하나 더 생각해 봐야 할 점은, 고구려인 관점에서의 북명과 신라인 관점에서의 북명은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일단 북명이란 단어가 어느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라는 점, 신라와 고구려의 관점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김부식이 말한 위치가 분명하지 않고 이름..

동아시아 역사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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