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 2

수원화성 축성, 조선 실학 정약용의 거중기와 공사 실명제

수원화성 축성, 조선 실학 정약용의 거중기와 공사 실명제 수원화성의 축성 계획1790년 부사직副司直 강유姜游(1722~?)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자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수원에 성곽을 쌓을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수원화성 축성 시작) 정조는 신도시 수원의 건설로 정치, 사회, 경제, 국방 전반에 걸친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성곽의 문제점을 해결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축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서학을 익힌 규장각 소속의 신진 관료인 정약용에게 축성 계획을 지시하였다. 정약용은 정조의 의중을 꿰뚫고 중국과 일본의 성제城制는 물론 중구을 통해 입수한 서양 과학 기술 서적을 연구하여 1792년 성을 쌓기 위한 이론과..

동아시아 역사 2017.11.06

극성스런 제갈량의 북벌 - 국가의 안보를 위한 몸부림

출처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삼국지의 영웅호걸, 이우각 제갈량의 북벌은 극성스럽다. 마치 '전쟁에 미친' 전쟁광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라의 안보를 더욱 튼튼히 하려는 당연한 몸부림이었다.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지 않으면 '대문이 없는 집'이나 '담장이 무너진 집'이라는 측면에서 기를 쓰고 기산(후난성 남부)을 차지하려 들었다. 앞에는 위수가 있고 뒤에는 사곡이 있었다. 해발 779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백 리에 걸쳐 있는 큰 산이다. 곱돌(활석)과 대리석이 많은 데다 삼림자원 또한 풍부한 알짜배기 산이다. 제갈량은 기산의 자원 때문이 아니라, '촉으로 향하는 중요한 대문이고 담장'이라서 기어이 차지하려 하고 지키려 했다. 그 대신 낙양(허난성 북서부)에 도읍지를 정한 위나라는..

동아시아 역사 2017.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