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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5

유목생활 대신 농경생활을 택한 탁발선비 [북위]

유목생활 대신 농경생활을 택한 탁발선비 [북위] 사실 북위는 등국 초(386~) 부락 해체 때 시동위편민始同爲編民또는 개동편호皆同編戶라는 기록은 곧 탁발선비족이 지난 시절의 유목생활을 버리고 부족 조직을 해체하여 농경민화 된 편호로 개편(농경생활은 곧 한화漢化를 의미)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인 것 같다. 왜냐하면,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 태조가 후연 정벌을 마치고 대국 평성에 개선한 뒤 성곽을 축조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대군, 선무, 음관, 참합을 경계로 하는 기내를 획정했다. 그 주변의 사방사유四方四維(동, 서, 남, 북과 손巽=동남, 곤坤=서남, 진辰=동북, 건乾=서북)의 기외에는 선비계 유목민의 8부(8국)를 배치하여 각각 8부대인 1명을 임명하여 농상을 권장하고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또 명원제..

동아시아 역사 2017.11.14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 반란 지도 (형세도, 세력 일람)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 반란 지도 (형세도) 위진남북조 시대 북방을 통일했던 북위 말기 지도입니다. 위 파일은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를 그린 지도입니다. 1603 x 842 크기로 용량이 1.8MB입니다. 글자가 작으니 클릭해서 크게 보시고요.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름을 남겼던 북위 반란 세력들 일람은 아래에 따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음音은 다를 수 있다는 점 유념해주세요. 지금 포스팅하느라 그림을 다시보니, 북위의 포여, 강현, 하동은 너무 왼쪽으로 갔네요. 반대로 장안은 왼쪽으로 덜 갔고요. 나머진 그런데로 괜찮은데 하필이면 위진남북조 시대 관중 일대에 오류가 있네요. 그리고 동그라미 크기가 다른데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리다 보니 크기가 안 맞을 뿐입니다. 원래는 다 같은 크기로 하려고 했는..

동아시아 역사 2017.09.20

북위 귀족 내몽골 유물-1500년전 칠관형'관'漆棺开棺

북위 귀족 내몽골 유물-1500년전 칠관형'관'漆棺开棺 북위 귀족 유물 - 지난 2014년 3월 8일, 내이멍구자치구内蒙古自治区(내몽골자치구) 시린궈러锡林郭勒(석림곽혁, 정확히는 시린하오터시锡林浩特市) 초원에서 1,500년 전 북위 귀족의 칠관형관이 발견되었습니다. 무덤 주인은 북방 민족 중 북위 귀족으로 추정되나 성별은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목관 재료 : 소나무목관 길이 : 2.7m목관 높이 : 높은 쪽 1.4m, 낮은 쪽 1.2m 표면 : 검은색 진흙 묻힌 북위 귀족 사람 머리는 비단으로 감쌌으며, 금으로 도배가 되어있습니다. 내부엔 여러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인물 형상을 살펴본바, 선비족의 특성이 있습니다. 목관 외부는 많이 부패한 상태로 외부가 특히 심하며 내부는 비교적 나은 상황이라 북위 귀..

동아시아 역사 2017.07.01

북위 문명태후 풍씨(풍태후), 그녀의 프로필 [효문제와의 관계]

북위 문명태후 풍씨(풍태후), 그녀의 프로필 [효문제와의 관계] 문명태후 풍씨(풍태후, 효문제의 어머니)는 하북의 장락군張樂郡 신도信都 기현冀縣 사람으로 북연의 제2대 왕 풍홍馮弘의 손녀이고, 외가는 낙랑 왕씨로 호한의 혼혈녀이다. 오랫동안 이적夷狄 사이에서 생활하여 한족다운 관습이나 감정이 전혀 없었으며 선비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풍태후(북위 원굉의 어머니, 효문제)의 고모가 세조 태무제의 좌소의로 입시入侍한 연유로 그녀는 14세에 문성제의 귀인이 되고 뒤에 황후가 되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문성제가 재위(452~465) 14년 26세를 일기로 죽자 12세의 황태자 홍弘이 즉위하니 이가 헌조 헌문제이다. 문명태후는 거기장군 을혼을 제거하고 헌문제가 유약하다는 이유로 수렴 정치를 하게 되었다. 풍태후 집..

동아시아 역사 2016.11.09

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 삼국사기에 누락된 아신왕 항복

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 삼국사기에 누락된 아신왕 항복 다음카페 한사모에 올라왔던 댓글을 정리했습니다. 댓글치곤 예리한 부분이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제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하며 무릎 꿇고 '이후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하였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끌려갔고, 이는 사실상 백제왕조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누락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더욱 이상한 것은 다음 해 왜에 전지 태자를 볼모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하 댓글 댓글1."아리수를 건너 성을 찌르고 죄어 보내었다. □□소굴로 돌아가니 □편을 둘러쌌다. 백잔주가 죄임에 괴로워하여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나와 바치며 왕 앞에 꿇어앉아 ..

동아시아 역사 201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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