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 4

극성스런 제갈량의 북벌 - 국가의 안보를 위한 몸부림

출처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삼국지의 영웅호걸, 이우각 제갈량의 북벌은 극성스럽다. 마치 '전쟁에 미친' 전쟁광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라의 안보를 더욱 튼튼히 하려는 당연한 몸부림이었다.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지 않으면 '대문이 없는 집'이나 '담장이 무너진 집'이라는 측면에서 기를 쓰고 기산(후난성 남부)을 차지하려 들었다. 앞에는 위수가 있고 뒤에는 사곡이 있었다. 해발 779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백 리에 걸쳐 있는 큰 산이다. 곱돌(활석)과 대리석이 많은 데다 삼림자원 또한 풍부한 알짜배기 산이다. 제갈량은 기산의 자원 때문이 아니라, '촉으로 향하는 중요한 대문이고 담장'이라서 기어이 차지하려 하고 지키려 했다. 그 대신 낙양(허난성 북서부)에 도읍지를 정한 위나라는..

동아시아 역사 2017.05.09

실패한 쿠데타,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출처 -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자주국의 꿈 서경 천도파에 대한 반격은 인종의 장인이자 개경 수호 세력인 동지추밀원사 임원애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원애는 인종 10년(1132) 8월, 상소를 올렸다.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괴와 해괴한 말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속이고 미혹하는데, 한두 명의 대신들이 그들의 말을 깊이 믿어 위로 임금의 눈과 귀를 흐리니 장치 큰 환난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묘청 등을 저자에 내다 목을 베어 화의 싹을 끊도록 하소서." 하지만 인종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임원애의 상소가 있은 뒤 묘청은 인종에게 아뢰었다. "성상께서는 대화궁에 거처하셔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하실 것 같으면 근신을 보내 옥좌를 설치하고 공경해 받들기를 성..

동아시아 역사 2017.03.19

동진 조적과 유곤, 관중에서 꺼진 서진의 마지막 불꽃

유곤劉琨은 조적을 가리켜, 명쾌하게 이치를 터득하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말했다. "그는 젊었을 때, 왕돈王敦을 감탄케 한 사람이야." (1)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유효표의 주. (1) 우예虞預 진서晉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적의 자는 사치士稚이며 범양范陽 주遒 땅 사람이다. 방일하고 활달하여 예의범절 따위를 익히지 않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는 한편 베풀기를 좋아했다.' (출처 ; 闻鸡起舞) 진양추晉陽秋에는 이런 말이 있다. '조적은 사공司空 유곤과 함께 호걸로서 세상에 이름이 자자했다. 24세 때 유곤과 같이 사주주부司州主簿로 부름을 받았다. 서로 정이 두터워 함게 이불을 덮고 잔 일도 있었는데 한밤 중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모두 일어나서 말했다. "이는 나쁜 소리만은 아니오." 두 사람은 ..

동아시아 역사 2017.01.05

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343년, 강제 건원 원년의 일)유치공庾穉恭(유익, 庾翼)은 이전부터 중원을 회복코자 하는 뜻(북벌 정책 찬성자)을 가지고 있었으나 (큰 형) 문강文康(유량, 庾亮)이 살아 있을 때는 그 권력이 강했고, 그런 실권이 자기에게는 없었다. (둘째 형) 계견季堅(유빙, 庾冰)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전화戰禍를 꺼리고 두려워했다. 유치공은 그와 오랫동안 시비를 벌인 다음에야 겨우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형荊, 한漢 지방의 총병력을 투입하고, 군선軍船과 병거兵車를 있는 대로 총동원했으며 군단을 양양襄陽에 진주시켰다. (1) 그곳에서 치공은 막료들을 전원 집합시키고 군기軍旗와 무기 일체를 도열시킨 다음 친히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말했다. "이번에 내가 ..

동아시아 역사 2016.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