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 14

세설신어, 위진남북조 송나라 유의경 명저, 서평 (명문당)

세설신어, 위진남북조 송나라 유의경 명저, 서평 (명문당) 세설신어세설신어는 남송 소흥 8년(1138), 동분이란 사람이 보관하던 세설신어 구본과 안수의 수정본을 육유가 상, 중, 하로 나눴다.안타깝게도, 그때의 세설신어는 중간에 일실 되었고, 이후 명나라 원경이 육유의 수정본을 다시 수집해 내놓았다. 명나라 왕세정은 하양준의 어림을 가하여 세설신어보로 간행했다.이것이 크게 유행되었는데 이 책은 원래의 세설신어를 많이 삭감하고, 또 순서를 바꾸었는데, 이것에 당송명인들의 사적을 더 가한 것이므로 세설신어의 본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청나라가 되어 왕선겸이 원경본을 가지고 사현강사본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일 많이 퍼져있는 세설신어이다.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세설신어가 바로 이것이다. 유의경, ..

동아시아 역사 2017.09.28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 반란 지도 (형세도, 세력 일람)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 반란 지도 (형세도) 위진남북조 시대 북방을 통일했던 북위 말기 지도입니다. 위 파일은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를 그린 지도입니다. 1603 x 842 크기로 용량이 1.8MB입니다. 글자가 작으니 클릭해서 크게 보시고요.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름을 남겼던 북위 반란 세력들 일람은 아래에 따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음音은 다를 수 있다는 점 유념해주세요. 지금 포스팅하느라 그림을 다시보니, 북위의 포여, 강현, 하동은 너무 왼쪽으로 갔네요. 반대로 장안은 왼쪽으로 덜 갔고요. 나머진 그런데로 괜찮은데 하필이면 위진남북조 시대 관중 일대에 오류가 있네요. 그리고 동그라미 크기가 다른데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리다 보니 크기가 안 맞을 뿐입니다. 원래는 다 같은 크기로 하려고 했는..

동아시아 역사 2017.09.20

중국 인민 지원군이 북한에서 저지른 성범죄, 1954~1956년

중국 인민 지원군이 북한에서 저지른 성범죄, 1954~1956년 중국 인민 지원군은 북한에 주둔하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을 도왔다. 중국 인민 지원군의 주둔 목적은 노동력을 활용하여 북한을 지원하고 안보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중국 인민 지원군이었다. 하지만 과연 북한도 이들의 주둔을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과 중국의 공개 자료들은 대부분 중국 인민 지원군의 성과만을 위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중국 인민 지원군이 들어올 때부터 이들이 들어오면 상황이 변화되리라 예측하였고, 실제로 이들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음으로써 중국은 북한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었다. 양국의 갈등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차 갈..

동아시아 역사 2017.09.18

[위진남북조] 노포 전신론, 돈이 신이 된 시대

[위진남북조 서진] 노포 전신론, 돈이 신이 된 시대 돈이 신이 된 시대위진남북조 서진 시대, 돈의 활동 범위는 보통 사람들의 범위보다 훨씬 넓었다.노포도 이에 주목해 다시 돈의 활동범위를 설명하고 있다. "아무런 덕을 쌓지 않았는데도 높임을 받고 세력을 갖지 않았는데도 뜨겁게 맞아줍니다.금마문金馬門을 밀치고 자달紫闥로 들어가서 위태로워진 것을 안전하게 만들어주며, 죽을 것도 살게 하여줍니다.귀한 사람이지만 천하게 부릴 수 있고 산 것이지만 죽이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돈의 위력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덕을 쌓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이를 쌓은 사람은 자연히 부귀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돈은 이러한 덕을 쌓은 일이 없는데도 궁궐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게 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

동아시아 역사 2017.09.17

[위진남북조] 중국 북위 수도 평성 유적지 사진

[위진남북조] 중국 북위 수도 평성 유적지 사진 ※ 이 글은 2013년 중국 블로거의 포스트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출처는 맨 아래에 있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중국 북위 초기 수도는 평성平城으로 현재의 대동시大同市 구시가 지역입니다. 2008년 대동시는 역사문화 복원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평성 유적지 복원(특히 위진남북조 시기 중국 북위 유적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현재 대동시 옛성大同古城은 명나라 홍무제 25년(1392년)에 수리되며, 기존 흙성土城을 허물고 그 위에 돌로 성벽을 새로 쌓았습니다. 새로 쌓은 성벽(중국 북위 수도 평성 유적지의 외부)은 동서로 1.8km, 남북으로 1.82km, 둘레 7.24km, 높이는 높은 곳이 14m, 낮은 곳이 2m이며 16.6m까지 올라간 곳도 있습니다. ..

동아시아 역사 2017.09.14

[북방민족 지도3] 위구르, 몽골, 러시아? (거란족 요나라~만주족 청나라)

[북방민족 지도3] 위구르, 몽골, 러시아? (거란족 요나라~만주족 청나라) 중국 동북의 분홍색은 여진족으로 원래 흑수말갈이 조상입니다. 흑수말갈은 숙신, 읍루, 물길이 조상이죠.여진족은 거란과 송나라를 압박하는 데 성공하고 결국 금金나라를 건국합니다. 일찍이 돌궐은 유연을 정복했으나, 후에 돌궐은 여진족에게 정복당합니다. 오른쪽 빨간색 점은 실위 중심부, 선비족 거점지, 동호가 거주하던 곳으로 여진족은 그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는 그곳 사람들이 흑달단이 되어 몽고인들의 조상이 됩니다. 돌궐어로 실위는 달단鞑靼이라 합니다.당시 원나라 몽골족은 달단이라 불렸습니다. 원나라 말기 중국 남방에선 반란이 잇달았습니다.위 지도에 녹색 점은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거병지 호주濠州입니다. 북방으..

동아시아 역사 2017.09.13

[북방민족 지도2] 선비족, 유연, 돌궐, 거란 (위진남북조~거란 요나라)

[북방민족 지도2] 선비족, 유연, 돌궐, 거란 (위진남북조~거란 요나라) 선비족이 북선비, 서신비, 동선비로 나뉘었을 때, 북선비의 한 일파는 유연이었습니다. 유연의 작은 세력은 이내 커져 북방을 정복할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강력했던 유연도 나중엔 돌궐에 멸망해 북방에서 사라집니다. 이후 동쪽 실위는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닙니다. 사실, 유연과 선비의 일파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실위가 선비의 후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동호의 후예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히 선비족과 연관성이 짙습니다. 말갈 또한 원래 중국 동북쪽에 있던 민족입니다. 주나라, 진나라秦, 서한西漢 때는 숙신으로 불렸고, 위진 시대엔 읍루挹娄, 남북조 시대엔 물길勿吉,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러 말갈靺鞨이라 ..

동아시아 역사 2017.09.12

조조는 왜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였을까?

조조는 왜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였을까? 기록 1. 조조, 삼국지 속 서주 대학살 기록 기록 2. 조조, 후한서와 자치통감 대학살 기록 위 기사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삼국지나 후한서가 사망자 숫자나 사건순서에 있어 약간 다른데 자치통감은 대체로 삼국지 쪽을 참조했습니다. 저도 이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랐습니다) 193년 1차 침공 → 팽성 전투, 조조 승리 → 팽성(사수 일대)에서의 갱살 →도겸이 물러나 팽성 일대를 수비. 조조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 하비 일대를 공격해 도륙 → 군량 부족으로 회군 194년 2차 침공 → 낭야, 동해 일대 공략 → 담현 동쪽에서 유비, 조표 격파, 양분 함락 →여포의 연주 습격으로 회군 (행군 중에 고을을 다수 잔멸시킴) 1) 도륙, 잔멸, 잔륙 등등으로 다양하게..

동아시아 역사 2017.09.10

요재지이聊齋志異 초기 판본 삽화 감상

청清나라 사람 포송령蒲松齡이 지은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중국 고전 중 단편소설을 집대성한 걸작으로 꼽힙니다. 포송령은 풍부한 상상력과 허실虛實을 적절히 판단/조합는 수완을 부려, 세간의 그림들을 망라한 삽화를 묘사해냈습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삽화는 상주요재지이도영詳注聊齋志異圖詠 16권 중 1권으로 심은湛恩이 주를 달았으며, 광서光緒 12년(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 1886) 상해上海 문서국文書局의 인장이 찍힌 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은 원래 광백송제(廣百宋齋, 이 부분 헷갈림. 제보 부탁)의 주인 서윤徐潤(1838-1911)이 소유하던 소장본藏本입니다. 이 책은 명청明清 대 최고의 소설 삽화본입니다. 요재聊齋는 세상에 나온 후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청나라 광서 12년(1886年), 상해 문서..

동아시아 역사 2017.09.09

대가야의 성장과 쇠퇴 (사다함의 신라군에 멸망)

3~4세기 김해의 금관가야가 가야 제국諸國의 선진국가로서 연맹을 주도하던 시절에 대가야는 금관가야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제철 기술을 도입하고 야로철산冶爐鐵山을 개발함으로써 5세기에 획기적인 국가발전을 이루었다. 마침 4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백제를 누르고 남쪽으로 군사를 보내 낙동강 유역에까지 진출함으로써 금관가야를 비롯한 해안지역의 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그동안 내륙에서 착실히 성장해온 대가야가 더욱 급속히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남제서 동남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오르니 먼 곳의 오랑캐가 두루 교화되는구나. 가라왕 하지는 동쪽..

동아시아 역사 2017.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