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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출신 제갈량의 배경과 조건 (유표, 채모, 황승언)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19. 02:04

금수저 출신 제갈량의 배경과 조건 (유표, 채모, 황승언)


먼저 제갈량은 매우 좋은 배경을 갖추었습니다. 우리는 제갈량의 가족들이 보통의 평범함 백성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선조 제갈풍諸葛豊은 사례교위司隷校尉를 지낸 사람입니다. 사례교위의 지위는 높고 권력은 강하여, 서한 시대에는 삼공三公의 아래, 구경九卿의 윗자리에 해당했으며, 동한 시대에는 상서령, 어사중승御史中丞과 더불어 삼독좌三獨坐(위의 세 직책은 조정에서 조회할 때에 전용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삼독좌라 불렸음)라고 불렸습니다.


제갈량의 부친인 제갈규諸葛珪는 군승郡丞을 지냈고, 숙부인 제갈현은 태수를 지냈기 때문에, 제갈량도 관리의 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료 사회의 사정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그도 얼마간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관료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역시 얼마간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갈량에게는 네트워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장모와 유표의 후처는 친자매 간으로, 둘 다 채풍蔡諷의 딸이자, 채모蔡瑁의 누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표는 제갈량의 부인에게 이모부가 되는 셈이며, 채모는 제갈량 부인의 외삼촌, 제갈량 본인은 채씨 집안의 외손녀 사위가 됩니다.


유표는 형주의 행정 책임자이고, 채씨 가문은 양양의 명문가이며, 채모는 유표의 심복이니, 제갈량에게 이만한 정치적 자원이 있다면 아주 좋은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제갈량이 이 집안과 맺은 혼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눈 속의 매화를 보는 황승언[금수저 제갈공명] 눈 속의 매화를 보는 황승언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黃承彦은 당시의 명사였습니다. 그는 제갈량을 매우 좋게 보았기에,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자 했습니다.


황승언은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얼굴은 매우 못생겼지만, 재주는 뛰어난데, 이 아이에게 장가를 들 생각이 있소?"


제갈량은 동의하고, 황승언은 곧바로 못생긴 여식을 수레에 태워 그에게 보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황승언이 겸손한 말을 한 것으로, 사실 그의 딸은 추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황승언의 이 말을 제갈량에 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여색을 중시하는지 재주를 중시하는지를 보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황씨의 여식이 틀림없이 못생겼을 거로 생각합니다.

첫째, 내게 못생긴 딸이 있는데, 노란 머리에 거무튀튀한 피부를 가졌다고 말한 황승언 자신의 말이 그 증거가 됩니다. 만약 겸사로 한 말이라면,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재주는 서로 배필이 될 만하다라고 한 말을 보자면, 결코 겸손한 것만도 아닙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반응을 증거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일을 기록하고 있는 양양기襄陽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우스워하고 즐겁게 여겼다. 마을에서는 그 때문에 '공명처럼 부인을 선택하지 말 것이니, 그리되면 아승阿承(황승언을 말함)의 추녀를 얻게 되리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황씨의 딸이 추녀라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왜 이러한 혼사에 응한 것일까요?


여기에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삼고초려에 함께했을지도 모를 황부인[금수저 제갈공명] 삼고초려에 함께했을지도 모를 황부인


첫 번째 견해는 제갈량이 아내를 얻을 때 덕德과 재才를 중시하고 외모는 중시하지 않을 정도로 인격이 훌륭하고 절개가 굳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견해는 이와 상반되는 것으로, 제갈량이 황승언의 사회적 명성과 사회적 관계를 중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인이 조금 못생긴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다시 첩을 두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얻어서 덕을 얻고 첩을 들여서 여색을 추구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관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원인 때문에 이런 결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고인古人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여러분께서 각자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런 관계가 있었으므로, 제갈량이 만약 유표 측에서 그저 그런 관직을 얻으려고 했다면 매우 쉬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제갈량은 또 하나의 작은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이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당대에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갈량을 좋아했으며, 항상 제갈량을 도와 그를 선전했습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서서徐庶의 추천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형주의 명사 사마휘司馬徽, 방덕공龐德公 등은 제갈량을 매우 높이 평가했습니다. 와룡臥龍이라는 호칭은 사마휘가 제갈량에게 선사한 것이며, 방덕공은 자기 아들을 제갈량의 둘째 누나에게 장가들게 했습니다.


제갈량은 비록 초려草廬에 은거하며 융중에 머물렀지만, 오히려 '담소하는 사람은 모두가 대학자들이고, 왕래하는 벗 중에는 지식이 얕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와 관계나 교류가 있었던 사람은 고관 아니면 명사였습니다. 그의 정치적 자원과 조건은 당시의 많은 사람보다 좋았습니다.


방덕공과 사마휘[금수저 제갈공명] 방덕공과 사마휘



예를 들어, 가후는 가족적인 배경도 없었고, 교류할 만한 네트워크도 없었으며, 가는 곳마다 어떤 사람도 그를 위해 선전을 해주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단신으로 천하를 주유하고 운에 몸을 맡기며, 도적 떼와 군벌의 소굴에서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조조가 있는 곳에서 높은 벼슬과 녹봉을 받으며 천수를 누리고 살아갈 때까지 그의 여정은 실로 쉽지 않았습니다.


삼국지 강의 1권, 이중톈, 김영사


그리고 아래는 촉나라의 미래 때문에 고민이 많으신 승상의 모습입니다.


촉나라 걱정에 한대 피우시는 승상

(승상께선 한나라 재건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셨습니다)


담배피는 제갈량

(고뇌에 가득 찬 저 표정을 보세요. 안쓰럽네요.)


금수저 삼국지 제갈량

(그러나, 타고난 금수저라 그런가, 청나라 시기엔 황제로 환생하십니다)


금수저 출신 제갈량의 배경과 조건 (유표, 채모, 황승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