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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문명태후 풍씨(풍태후), 그녀의 프로필 [효문제와의 관계]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9. 04:00

북위 문명태후 풍씨(풍태후), 그녀의 프로필 [효문제와의 관계]


문명태후 풍씨(풍태후, 효문제의 어머니)는 하북의 장락군張樂郡 신도信都 기현冀縣 사람으로 북연의 제2대 왕 풍홍馮弘의 손녀이고, 외가는 낙랑 왕씨로 호한의 혼혈녀이다.


오랫동안 이적夷狄 사이에서 생활하여 한족다운 관습이나 감정이 전혀 없었으며 선비족과 다를 바가 없었다. 풍태후(북위 원굉의 어머니, 효문제)의 고모가 세조 태무제의 좌소의로 입시入侍한 연유로 그녀는 14세에 문성제의 귀인이 되고 뒤에 황후가 되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문성제가 재위(452~465) 14년 26세를 일기로 죽자 12세의 황태자 홍弘이 즉위하니 이가 헌조 헌문제이다.


문명태후는 거기장군 을혼을 제거하고 헌문제가 유약하다는 이유로 수렴 정치를 하게 되었다. 풍태후 집정 1년 남짓에 헌문제가 큰아들 굉宏(고조 효문제)이 탄생하자 손자 양육에 전념한다 하여 정권을 황제에게 반환하였다.


태자 굉이 5세 때 문명태후는 헌문제에게 압력을 넣어 양위시키고 스스로는 태황태후가 되었다. 헌문제는 태상황제로 국사를 처결하다가 태후의 총신 이혁을 살해하여 풍태후의 원한을 사서 승명承明 원년(476) 헌문제는 암살되었다.


이때부터 태후는 다시 집정하여 태화 14년(490) 그녀가 죽을 때까지 국사를 처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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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태후와 효문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효문제는 문명태후의 친아들이지만 형식상으로는 이 귀인의 아들로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효문제가 태어났을 때 그 아버지 헌문제는 만 13세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자녀를 낳기에는 너무 어리고 또 권세욕이 강한 그녀가 손자인 효문제의 양육을 위해서 집정을 중지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 풍태후와 효문제는 친모자라는 관계라는 해석이 있다.


그렇다면 효문제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헌문제가 살해한, 태후가 총애한 한인 명족 조군趙郡 이씨 출신인 이혁이라는 설도 있다. 또 현조 헌문제가 친아버지이고 문명태후가 친어머니라는 설도 있으나 이 문제를 확정 지을 만한 증거는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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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에서는 황자가 태자로 책봉되면 그 생모를 죽이는 관례가 있었다.


효문제의 생모라고 하는 이 귀인도 효문제가 3세 때 태자로 책봉되자 사사賜死되고 효문제의 큰아들 순恂을 태자로 책정하려고 할 때 그 생모인 효문제의 비 임씨도 황제의 조명간청助命懇請(목숨을 걸고 간절히 청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풍태후가 죽음을 내렸다.


문명태후의 궁중 내막이 상당히 난잡하였다.


태후 집정기에 관리 녹봉제, 삼장제, 균전균부제 등 일련의 개혁이 단행되고 무치武治에서 문치文治로, 지방호족의 분권에서 중앙집권으로, 호한의 융합으로, 탁발의 종족적 국가가 진실로 중국적 국가로 전환이 표면화한 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혁신적 개혁을 입안하고 시행을 담당한 자들은 문명태후와 효문제 측근의 한족 관료들이다.


출처 : 위진남북조사, 이공범, 지식산업사

북위 문명태후 풍씨(풍태후), 그녀의 프로필 [효문제와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