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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영조와 정조 어필 (홍재전서, 탕평비 등)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17. 05:45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정조와 영조 어필


홍재전서 조선 임금 정조 어필[수원화성박물관] 홍재전서


홍재전서弘齋全書


조선 임금 정조의 시문, 윤음, 교지 및 편저를 모은 전집으로 총 184권 100책이다.


1799년(정조 23) 편집하기 시작하여 총 190편으로 정리하였으며, 정조 사후 말년의 저술들을 덧붙여 1801년(순조 원년)에 재편집하고 1814년(순조 14)에 간행되었다.


홍재전서 조선 정조 어필 수원화성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홍재전서


춘저록春邸錄이라는 표제 아래 세손 시절의 시문 정리를 시작으로 조선 임금 정조 자신의 글뿐만 아니라 신하들과의 응답 내용, 해당 관서의 기록에 대한 국왕의 최종 판결, 정조 재위 기간에 편찬된 서적의 해제解題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탕평비蕩平碑

1742년(영조 18) 영조가 탕평책을 널리 알리고 편당을 막고자 성균관 입구 반수교 옆에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 예기禮記 가운데 한 구절을 친히 써서 당시의 최고학부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전면]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이 바로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이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


[후면]

皇明崇禎紀元後百十五年歲任戌春三月二十六日手書命竪泮水橋傍上八字是

聖訓下十二字乃嗟今時勉來世之意也

황조 숭정기원후 115년째 임술년 봄 3월 26일 직접 써서 반수교 옆에 세우라 명하다.

위 8자는 성인의 가르침이요, 아래 12자는 아! 지금의 다음 세대를 힘쓰게 하는 뜻이다.


훈유사편 조선 임금 영조 어필[수원화성박물관] 훈유사편


훈유사편訓諭四篇


1743년(영조 19) 조선 임금 영조가 사도세자의 관례冠禮 때 교훈 되는 글을 짓고 쓴 훈유 4편을 석각한 인본첩이다.


사언구의 훈유시訓諭詩를 비롯하여 훈유의 간행을 명한 수훈원량垂訓元良, 세자의 표자表字에 대한 예자설譽字說, 세자의 압자押字(서명)에 대한 예압설睿押說이다.

이를 음각하여 새긴 대리석 석판 22매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 펼친 면은 영조가 사도세자의 관례 때 어제어필 훈유의 간행을 명하며 당부한 글이다.


영조 어필 삼시성편 수원화성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영조어필


조선 임금 영조어필英祖御筆


영조가 1772년(영조 48) 2월 6일에 친히 짓고 쓴 행서체 큰 글씨다. 삼시성편蔘蓍性編 대소의심大小宜審이라 쓴 후 좌측에 친제親製 자필自筆 임진壬辰 중춘仲春 육일六日이라고 덧붙여 적었다.


영조 어필 행서체 수원화성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영조어필


인삼과 가새풀은 성질이 서로 다르므로 각기 써야 할 곳을 마땅히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새풀은 일명 톱풀이라고도 하는데 피를 잘 순화하게 하고 풍을 제거하며 통증을 완화하는 효능이 있다. 왕실 의료 전담기구인 내의원에 내려 준 글씨로 추정된다.


영조 어필 조선 임금 정조 어필[수원화성박물관] 영조어필


영조수서비답첩英祖手書批答帖


우의정 조현명趙顯命(1691~1752)이 44번째로 정사(사직서)를 올려 사직을 청하자 1745년(영조 21) 7월 14일 조선 임금 영조가 불허하여 직접 써서 내린 비답批答 1건을 실은 첩帖이다.


영조는 사직서에 대한 답을 특별히 어필로 써서 조현명이 조정에 나오도록 적극적으로 권하고 간절한 심정을 담아 승지承旨를 시켜 전하게 하였다.


영조수서비답첩 조현명 우의정 수원화성박물관[수원화성박물관] 영조수서비답첩


이해 봄에 조징과 이희의 무고巫蠱 사실을 조현명과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영조에게 아뢰에 국문이 시작되었는데, 이주 조현명은 그 책임과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하였다.


조현명이 5월 19일 첫 번째 정사를 올리고 8월 8일 61번째 정사를 올리기까지 영조는 계속해서 조현명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흥감서시원량興感書示元良


1744년 2월 4일 영조가 사도세자와 함께 태조를 비롯한 열성의 어진을 봉안한 영희전永禧殿을 참배하고 이튿날 이를 기념하여 지은 시의 친필 초고본이다.


흥감서시원량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영조 어필[수원화성박물관] 흥감서시원량


내용에 의하면 영조는 22년 전인 1723년(경종 3) 왕세제로서 경종을 모시고 영희전을 따라갔었는데, 이번 행차에 사도세자와 함께 다녀오게 되어 감회가 일어나 이 시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를 새긴 현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744년 2월 5일의 승정원일기에 조선 임금 영조가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민계閔堦(1693~1754)에게 사도세자 앞에서 이 시를 읽고 풀이하게 한 기사가 나온다.


계묘년(1723, 경종 3)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이 지났는데,

지난날 어찌 오늘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랴.

훈계하는 시 간직하고 밤낮으로 명심하라.

옛 신하들 부지런히 생각하며 잊지 못하리.

앞구와 뒷구는 이전의 시를 그대로 썼다.

대의는 훈계한 말과 대체로 같다.

세자에게 묻고서 마음이 유쾌하기가 마치 그때와 같다.


감회가 일어나 세자에게 보이다.

계묘년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이 지났는데

지난날 돌이켜 생각하면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알았으랴.

훈계하는 시 명심하고 항상 성심껏 따르면서

옛 신하들 부지런히 생각하며 잊지 못하리.

갑자년(1744, 영조 20) 2월에 쓰다.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정조와 영조 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