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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남풍, 암군 사마충의 황후-폐위되지 않은 이유? [중국악녀 이야기]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15. 04:00

가남풍, 암군 사마충의 황후-폐위되지 않은 이유? [중국악녀 이야기]


중국악녀 가남풍의 친인척 가모 등이 음행淫行을 일삼았던 가남풍을 폐위시키려고 한 까닭은 죽어도 도덕적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적 명교의 원칙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 황후이자 중국악녀 가남풍의 부도덕성이 탄로 나 그녀와 가까운 자기들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한 것일 따름이었다. 즉,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득실의 계산이었을 뿐, 유가적인 도덕이 그 이유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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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를 함께 논의한 사람들도 결국에는 모두 한발씩 물러났다.

그들은 가남풍의 남편인 암군 혜제 사마충이 그녀를 내쫓지 않을 수도 있다면, 황후 폐출의 도모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화로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암군 혜제 사마충은 황후 가남풍의 일탈을 알았다 해도 별 제재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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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가남풍의 음행에 대한 암군 혜제 사마충의 묵과는 유가 사상이 사회규범으로 자리매김하던 한대漢代나, 성리학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송대宋代 이후 시대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진晉 초기에는 이미 예禮가 명목만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남풍의 행동에 대해 좀 심하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며 이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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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당시에 가남풍의 음행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대에 와서 성리학이 사회규범으로 정착되었던 시기의 사람들이 성리학적 기준을 가지고 그녀를 매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있다.

당대唐代까지만 하더라도 황후인 그녀를 낮춰 가남풍이라는 이름만을 기록한 문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이 가후賈后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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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가남풍의 행실을 문제 삼을 수준의 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변함없이 암군 진혜제 사마충의 황후로 인정하고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대元代에 양유정楊維楨이 편찬한 복고시집復古詩集과 명대明代에 양신楊愼의 승암집升菴集, 명대에 송공전宋公傳의 원시체요元詩體要에는 그녀를 가남풍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거명하고 있다.


중국에서 판매되는 승암집과 복고시집중국에서 판매되는 승암집과 복고시집


모두 성리학이 사회규범으로 자리 잡은 송대 이후의 기록들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전의 문헌에서 황실에서 쫓겨나 비명에 죽었던 가남풍을 가후로 기록한 것은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의도가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즉 가후라는 존칭은 가남풍은 황후였다가 정치적 경쟁 속에서 패배하여 죽은 사람이라는 뜻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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