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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림답부가 혁명가인가? - 조선상고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7. 22:30

제5장 차대왕次大王의 피살과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전권專權 (혼자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름)


차대왕次大王의 20년 전제專制 (국가의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고 그 개인의 의사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함)


차대왕이 양위를 받아 20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하다가 연나(椽那)의 조의(皀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차대왕의 본기(本紀)가 간략하고 허술하여, 그 전제(專制)의 정도와 살해당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번역해 싣고 나서 논평하고자 한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태조왕의 동모제(同母弟 : 동모제 3字는 서자로 고칠 것)로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仁慈)가 적었다. 태조왕의 양위(讓位)로 왕위에 오르니, 나이 76세였다.


관나부 우태 미유와 차대왕관나부 우태 미유와 차대왕

(출처 : 위나암림 12화)


2년 봄 정월에 관나(貫那 : 灌那)의 패자(沛者) 미유(彌儒)로 우보(右輔)로 삼았다. 3월에는 우보 고복장(高福章)을 죽였는데, 그가 죽을 때에,


“원통하고 원통하다. 내가 당시에 선조(先朝)의 근신이 되어 어찌 난을 일으킬 사람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선군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시어 이에 이르렀거니와, 지금 임금이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政)과 교(敎)를 새로이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이제 불의로 충신을 죽이니 내가 무도한 세상에서 사느니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고 형을 받으니, 모두 이 소식을 듣고 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을 7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가니, 환나(桓那 : 椽那로 고칠 것임)의 우태 어지류로 좌보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大主簿)를 삼았다. 겨울 10월에 비류나(沸流那)의 조의(皀衣) 양신(陽神)으로 중외대부(中畏大夫)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우태를 삼았다. 이상은 다 왕의 옛날 친구였다.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불류나부 조의 양신. 위나암림불류나부 조의 양신. 위나암림

(출처 : 위나암림 12화)


3년 여름 4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왕의 원자(元子) 막근을 죽으니, 그 아우 막덕이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므로 왕이 이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왕이 무사(巫師)에게 물으니,


"여우는 요망한 짐승이니, 길한 상서가 아닌데 게다가 흰 여우니 더욱 괴이한 변입니다. 천제(天帝)께서 인간의 임금에게 맞대해서 순수히 말할 수 없으므로 요괴를 보여 임금이 두려워하여 반성하게 함이니 대왕께서 만일 덕을 닦으시면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흉한 것이면 흉할 것이고 길한 것이면 길할 것인데, 이제 이미 흉하다고 하고 또 길하다고 하니 어찌 속이는 말이 아니냐?"


하고 드디어 무사를 죽였다.


차대왕 일러스트. 위나암림차대왕 일러스트. 위나암림

(출처 : 위나암림 12화)


4년 여름 4월 정묘(丁卯) 그믐날 일식(日食)이 있었다. 5월에 다섯 별이 동쪽에 모였는데, 일관(日官)은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이는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


고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겨울 12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8년 여름 6월에 서리가 내려 쌓였다. 겨울 12월 천둥하고 지진이 있었다. 그믐날 객성(客星 : 彗星)이 달을 범하였다.


13년 봄 2월에 꼬리별[孛星]이 북두(北斗)를 범하였고 5월 갑술(甲戌) 그믐날에는 일식이 있었다.


20년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3월에 태조왕이 별궁에서 돌아가니, 나이 119살이었다. 겨울 10월에 연나의 조의 명림답부가 왕이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이고, 그 호(號)를 차대왕이라 하였다.”


이상이 차대왕 본기의 전부다. 맨 끝에, "명림답부가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였다."고 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을 상고해보면, 차대왕이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정사를 한 일이 하나도 없다.


명림답부 일러스트명림답부 일러스트

(출처 : 한나라 대군을 전멸시킨 명림답부 (1부))


고복장(高福章)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의 중간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인 사람이므로 내쫓은 것이고,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치려 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막근 형제는 차대왕과 맞선 적이므로 죽인 것이니, 이것을 아무리 참혹하고 불인(不仁)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의 보복이고, 인민에게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일뿐더러,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2년 또는 3년까지의 일이니, 18년 후인 차대왕 20년에 반란을 일으킨, 명림답부의 유일한 구실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ㆍ지진ㆍ성변(星變) 등뿐이니, 이 같은 천문 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의 잘잘못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이로써 인민에게 차마 못 할 일을 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가 여러 중신과 더불어 차대왕의 아우 백고 신대왕에게 왕위 계승을 권진(勸進)하였는데,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한 괴수요, 그 여러 중신이란 대개 미유ㆍ양신 등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자기 당의 이반(離反)에 의한 것일 것이다.


환나부 우태 어지류환나부 우태 어지류

(출처 : 위나암림 12화)


차대왕의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에 차대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한 그 무리가 차대왕과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도리어 왕을 배반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찾기 쉬운 것이다.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一人專制)의 나라가 아니라 벌족공치(閥族共治)의 나라이니, 국가의 기밀 대사는 왕이 전결(專決)하지 못하고, 왕과 5부의 대관들이 큰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으로 행하였다.


그런데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죽인 사람으로서, 비록 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를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君權)이 오직 제일임을 주장하여 모든 일을 자기 독단으로 하므로, 연나의 ‘선배’ 우두머리 명림답부가 그 본부(本部)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어지류 등이 내응(內應)하여, 태조왕이 돌아간 뒤를 기회로 하여 차대왕을 죽이고 벌족 공치의 나라를 회복한 것이다.


어떤 이는 명림답부를 조선 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고 하지마는,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가 있는 변동을 일컫는 것이니, 벌족 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랴?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 쟁탈의 효웅(梟雄)이라 함은 옳지마는 혁명가란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