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원나라 왕조의 특이성 (남북조 시대의 연장선)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8. 16. 20:00

몽고 초기 동북아시아 형세몽고 초기 동북아시아 형세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아시아의 절반을 치하에 다스린 몽골 제국은 그 영역의 광대함과 그 구성의 복잡함 때문에 머지않아 대분열을 일으키게 되는데, 즉 징기스칸의 손자 세대이다.


그 분열 때, 동아시아를 한 단위로 분립한 것이 다름 아닌 원나라이다. 그런데, 이른바 동아시아라고 하는 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만주, 몽고리아에 걸친 지역이기 때문에, 위에서 기술한 10세기 이후의 정복왕조 발전의 경과에 따라서 말하면, 이 원나라야말로 그 극한의 형태로 간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당 왕조의 멸망 이후 3세기 반 만에 재현된 통일 중국의 시대로 역대 중국왕조의 계보 속에 자리매김 해야 한다. 이러한 양면을 갖춘 원나라이지만, 여기서는 오로지 중국사의 관점에서 보는 그 역사적 의의意義의 설명에 한하기로 한다.


원나라의 출현은, 금-송의 대립으로 시작되는 160년간의 천하 분열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다만 원나라는 수隋-서진西晋과 나란히 단명한 통일왕조이긴 했지만, 그 통일 정치 90년간은 그 앞의 분열시대 불일치-불균형을 어느 정도까지 조정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원나라 90년은 송명 사이에서 앞으로는 송宋을 받고, 뒤로는 명明에 연속하는 지속시대로서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상정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결코 그와 같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징기스칸. 고려를 몰락시킨 주범징기스칸. 고려를 몰락시킨 주범

(출처 : 一代天骄之——成吉思汗)


원나라 자체가 정복왕조였던 데다가, 과거 160년간의 분열 또한 평범한 분열이 아니었다. 이민족에 의한 정복왕조와 한인왕조와의 대립이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족의 제도문화를 절충한 정복왕조는 소위 제3 문화의 창시자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3문화를 전통적 중국문화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한, 조잡함을 지적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복잡하고 치밀한 송의 관제는 금대에 들어와서 단순, 간결화되고, 사상 학술 면에서도 치밀하고 심원한 이학理學 등은 북족에게는 물론이고, 그 치하의 한인들에게도 점점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간다.


어느 몽골 황제 일러스트어느 몽골 황제 일러스트

(출처 : 大盛世版图!全世界艳羡(5))


실제로 주자학 등은 금에 전해지지 않은 채 금나라 멸망 후에 실시된 오고타이칸의 남송침략에 즈음해서 포로가 된 남송의 유학자 조부趙復의 손을 거쳐 몽골 지배하의 화북에 전해지는 것이다. 간신히 서민문예 분야에서 잡극이 계승되고 발전하는 것은 이 시기의 사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리라.


일반적으로, 북송의 문화 조류는 남송에서 당연히 답습되긴 했지만, 회수淮水 이북의 금에서는 그 방향을 굴절 당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에 더해서 분열 160년간에 강북과 금의 영역 내에 누적된 경제적 위축이 있다. 원래 강남과 강북과의 사이에서는 금-송시대 이전에 이미 경제적 격차가 생겨 왔었다.


활을 쏘는 몽고 기병활을 쏘는 몽고 기병

(출처 : baike.com)

그러나 북송의 통일시대에는 하남의 국도 변량에 집중하는 거액의 강남의 세전稅錢(세금과 각종 진상품)이 관리-병사에게 지급하는 급료 또는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조달의 자금으로 수도권에 방출되는 부분이 적기 때문에, 이것이 윤활유가 되어 강북의 여러 산업은 저락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강남의 특산품-사치품의 구입도 왕성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유통의 순환이 유지되고, 그 결과로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격차도 특히 강북 경제를 위축시키는 단계까지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분열시대가 되면 사정은 크게 바뀌어 간다.


강남의 풍부한 부는 금에서는 완전히 타국의 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수입하는 것은 자국自國 통화의 일방적 유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금나라 일대는 대송무역에 의한 통화유출로 고민하고, 통화 기근으로 고생했다. 통화의 부족은 불환지폐의 발행을 부득이하게 하지만, 이 양자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서 전면적으로 산업의 위축과 경제의 혼란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나라의 영토원나라의 영토

(출처 : 바이두 이미지)


분열시대를 통해서 북조측으로 진행한 이러한 남조와의 위화상태는, 원나라 90년의 통일기간으로는 도저히 바로잡아서 회복시키기에는 무리였다.


특히 원나라 그 자체가 한인 왕조가 아닌 정복왕조라고 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원나라에는 통일 왕조라고는 하지만 통일로 다 소화되지 않는 두 가지 형태, 강북과 강남이 底流로서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통일과 분열의 포합체라고도 칭해질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총체로서 불통일이란 이름을 피할 수 없다.


원나라가 역대 중국왕조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가장 특이한 존재였던 이유는 실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송-명사이에 위치하는 원나라의 역할은 통일 왕조라는 외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해도 완전히 불식되지 않는 남북조의 연장이라는 실질에 따라서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실은 송-명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로서의 시대였을지언정, 양자 사이를 메우는 지속적인 맥락은 아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출처 - 원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