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실패한 쿠데타,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3. 19. 15:18

출처 -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혁명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자주국의 꿈


서경 천도파에 대한 반격은 인종의 장인이자 개경 수호 세력인 동지추밀원사 임원애로부터 시작되었다. 임원애는 인종 10년(1132) 8월, 상소를 올렸다.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괴와 해괴한 말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속이고 미혹하는데, 한두 명의 대신들이 그들의 말을 깊이 믿어 위로 임금의 눈과 귀를 흐리니 장치 큰 환난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묘청 등을 저자에 내다 목을 베어 화의 싹을 끊도록 하소서."


하지만 인종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임원애의 상소가 있은 뒤 묘청은 인종에게 아뢰었다.


"성상께서는 대화궁에 거처하셔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하실 것 같으면 근신을 보내 옥좌를 설치하고 공경해 받들기를 성상께서 계시는 것과 같이하면 복과 경사가 친히 계실 때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인종은 묘청의 뜻을 받아들여 문공인과 이중부를 서경으로 보내 묘청의 말대로 행하게 했다. 인종은 지난날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서경 천도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세력들은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과대망상을 꿈꿨던 묘청과대망상을 꿈꿨던 묘청


인종 11년(1133), 직문하성 이중과 시어사 문공유 등은 상소를 올렸다.


"묘청과 백수한은 둘 다 요망한 사람으로 그 말이 해괴하여 믿을 수 없는데도 근신 김안, 정지상, 이중부와 내시 유개가 이들의 심복이 되어 이들을 천거하여 성인으로 삼았습니다. 여러 대신이 다라서 이를 믿으므로 성상께서 의심치 않으시오나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이들을 물리치고 멀리하소서"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인종은 그들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듬해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에 임명하고 자줏빛 가사를 하사하였다. 하지만 개경 세력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해 5월 국자사업 인완이 상소를 올렸다.


"성상께서 묘청을 총애하고 신임하시어 대신들까지도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니 그 뿌리가 깊고 굳어 쉬이 뽑아낼 수 없습니다. 허나 대화궁의 역사를 일으킨 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재변이 일어났음을 기억하소서"


그러자 묘청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인종에게 서경으로 순행할 것을 청했다. 인종이 대신들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김부식과 간관 들도 상소를 올려 극렬하게 반대했다.


"올여름에 벼락이 건룡전(서경 대화궁)을 쳤는데, 그곳으로 재앙을 피해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직 추곡을 거두지 않은 지금 행차를 하신다면 반드시 벼를 밟게 될 것이니,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만물을 사랑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이에 인종은 서경 순행을 포기하고 칭제건원의 요청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묘청 등은 인종 13년(1135) 1월 15일, 무력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묘청의 반란과 관군의 토벌로묘청의 반란과 관군의 토벌로


고려사절요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묘청과 유감이 분사시랑 조광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서를 위조하고 유수와 관료들을 잡아 가둔 뒤, 우승선 김신을 보내 개경 사람으로 서경에 있는 자를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가두고, 군사를 보내 전령을 차단했다. 또 사람을 보내 위협하여 군사들을 강제로 징발하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으며, 정부의 부서를 정하고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이름하였다.


역사에서 혁명이나, 반란이냐는 거사의 성공 여부에 의해 판가름나게 마련이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역사에 반란으로 남았다. 그러나 묘청의 거사를 혁명이나 최소한 인종을 위한 친위 쿠데타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묘청 등은 국호와 연호를 새로 정하면서도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꿈꾸었다면 새 왕을 옹립하거나 묘청 자신이 국왕으로 즉위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 왕을 옹립했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인종이 파견한 선유사(나라에 병란이 있을 때 왕명을 받들어 백성들을 가르치고 타이르던 임시 벼슬)를 예를 갖추어 대했다는 점이다.


서경의 거사 소식을 접한 인종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김부식, 임원애, 김정순 등에게 서경 토벌 계획을 세우게 하는 한편, 내시 유경심, 조진약, 황문상을 서경에 파견했다. 이에 묘청 등은 문무반으로 나누어 선 채 관풍전에서 선유사 일행을 맞아들였으며 유감 등은 뜰에 내려와 절을 하고 인종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갈 때는 "마땅히 표문을 올려 아뢸 일이었으나 너무 갑작스러워 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돌아가서 이런 사정을 아뢰어 달라"면서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는 봉서를 올렸다.


고려 서경과 개경의 위치


이때 만일 묘청에게 역심이 있었다면 선유사 일행의 목을 베거나 가두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묘청 등은 예를 다해 대접한 뒤 자신들의 목적은 오직 서경 천도에 있음을 밝혔다.


셋째, 인종에게 표문을 올려 자신들의 거사를 알렸다는 점이다. 거사를 일으킨 지 닷새 만인 1월 9일, 검교첨사 최경에 의해 인종에게 전달된 표문에서 묘청 등은 자신들의 거사가 오직 서경 천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성상께서 음양의 지극한 말을 믿으시고 도참의 비설을 고찰하시어 대화궁을 창건하여 하늘의 제도를 모방하셨습니다. 신 등이 또한 도읍을 옮긱기를 바랐으나 여러 대신이 임금의 마음을 받들지 않고 한갓 고토에 집착하여 옮기기를 꺼릴 뿐 아니라, 도리어 이를 막고 일을 해치니 서경의 인심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인심은 두려운 것이며 군종의 분노는 막기 어려운 것이 온데, 만일 성상께서 이곳에 왕림하신다면 병란은 곧 진정될 것입니다."


만일 묘청 등이 반란을 꾀했다면 자신들의 거사가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넷째, 다른 지지 세력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묘청은 당시 개경에 있던 정지상과 백수한 등 서경 세력은 물론 김안, 문공인, 홍이서, 이중부 등 서경 천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근신과 대신들에게조차 거사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이것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결코 반란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러나 묘청의 계획은 인종이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함으로써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김부식은 서경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인종의 허락도 얻지 않고 김정순을 시켜 묘청과 뜻을 같이했던 정지상, 김안, 백수한을 궁문 밖으로 글어내어 목을 베었다. 또한 묘청의 무리라 하여 음중인, 이순무, 오원사, 최봉심을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보냈다. 김부식이 이렇듯 서둘러 묘청과 뜻을 같이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인종의 변심을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인종이 정지상 등의 말을 듣고 서경 천도를 확정한다면 개경에 기반을 둔 자신들의 입지는 그만큼 약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묘청이 아닌 윤관 아들 윤언이가 아깝다묘청이 아닌 윤관 아들 윤언이가 아깝다


그리하여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파와 묘청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파 사이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일전이 벌어졌다. 서경에 도착한 김부식은 서경군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시일을 끌며 끊임없이 막료와 군리들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하지만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거사 동지인 조광 등은 김부식이 이끄는 대규모의 토벌군을 보고 겁을 먹은 나머지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목숨이 달아날까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조서를 가지고 온 김순부가 달래자 조광은 무리를 시켜 묘청을 비롯해 유감과 유참 부자의 목을 벤 뒤, 이들의 목을 윤첨 등에게 돌려보내며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서경 천도를 통해 국정을 쇄신하고 칭제건원과 금나라 정벌로 자주 국가 건설을 꿈꾸었던 묘청은 동지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생신을 마쳤으며, 저잣거리에 머리가 내 걸리고 나아가 역사의 요승이자 역신으로 기록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묘청의 죽음 이후 서경군은 국가 중흥을 위한 거사가 아닌 그야말로 반란군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개경의 대신들이 항복을 청하러 간 윤첨 등을 하옥해 버리자, 이에 놀란 조광이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황문상 등을 보내 무마에 나섰지만, 조광은 그들을 죽임으로써 자기 뜻을 확고히 했다.


장기전에 지친 묘청파 내부의 반란장기전에 지친 묘청파 내부의 반란


김부식의 토벌군은 몇 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성이 워낙에 견고한 데다 반란군들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하는 바람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부식은 진영을 설치하여 지구전을 벌이며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고 반란군의 사기가 저하되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 드디어 성을 함락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김부식은 흙으로 산을 쌓고 돌을 발사하는 포를 설치하는 등 공격준비를 했다. 그리고 정예병 1만여 명을 뽑아 세 길로 나누어 공격한 끝에 마침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때 조광은 난리 속에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서경이 평정되자 묘청, 백수한, 정지상, 유창, 조광 등의 가산은 몰수되고 처자는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 내에서의 족벌과 지역의 대립이었고, 풍수지리 사상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사상과의 충돌이었으며,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얽혀 일어난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국풍파와 한학파, 서경파와 개경파,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결에서 묘청이 김부식의 개경파에 패함으로써 역사의 발전이 정체되었고, 결국 무신의 난과 몽고 침입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