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윤관 - 영광을 위해 오랜 시간 인내했던 인물 1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4. 15. 08:00

출처 - 인물로 보는 고려사, 송은명


고려 중기의 문신 윤관은 여진을 정벌하여 9성을 축조한 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 숙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요나라에 파견되면서부터 신임을 얻어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후 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패한 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동북 지방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던 여진을 정벌했다. 그러나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반환하는 과정에서 패장이라는 억울한 모함을 받고 관직과 공신 작호를 빼앗긴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관은 무장으로서 잘 알려졌지만,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학자로, "장군이 됨에 이르러 진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지니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 열중했던 문신이기도 하다.


윤관 대원수 동상윤관 대원수 동상

(출처 : 韩国举行尹瓘大元帅铜像揭幕仪式)


요나라에 숙종의 즉위를 알리다


윤관은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삼한공신 윤신달의 고손으로,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윤집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 보권 등을 거쳐 합문지후가 되었으며, 선종 4년(1087)에는 왕명을 받고 광주, 충주, 청주를 시찰하기도 했다.


윤관이 관직에 크게 등용된 것은 숙종이 즉위한 후였다. 1094년, 선종이 세상을 떠나자 열한 살의 나이로 헌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어리고 병약하여 어머니 사숙태후 이씨가 술며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1095년 정월 초하루, 해 옆에 혜성이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것을 보고 일관이가 해석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해 곁에 혜성이 있음은 가까이에 있는 신하가 난을 일으킬 징조이니, 장차 신하들 가운데 반역을 도모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그해 7월 이자의가 역모를 일으켰다. 이때 이자의의 음모를 눈치챈 계림공 왕희(숙종)가 평장사 소태보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소태보는 상장군 왕국모와 의논한 끝에 수하들을 시켜 이자의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을 비롯한 잔당 17명을 제거했다. 이어 원신궁주와 한산후 등 이자의를 따르는 무리 50여 명을 귀양보냄으로써 난을 일단락지었다.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계림공 왕희가 헌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15대 왕 숙종이다.


이때 좌사낭중으로 있던 윤관은 형부시랑 임의와 함께 숙종과 헌종의 표문을 가지고 요나라에 가서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이어 숙종 3년(1098), 태자시강학사에 오른 윤관은 조규와 함께 송나라에 가서 숙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자치통감을 받아왔다. 두 차례에 걸친 파견으로 숙종의 신임을 얻게 된 윤관은 이듬해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에 임명되었으나, 그와 인척지간인 임의가 좌간의대부에 임명됨으로써 일가가 간원에 같이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건의에 따라 사임하게 되었다.


숙종 6년(1101), 추밀원지주사에 오른 윤관은 왕명을 받아 최사추, 임의 등과 함께 남경(지금의 서울)의 지세를 답사했다. 숙종은 즉위 후 운이 다한 개경을 대신할 새 왕도를 물색했는데, 재신, 일관들과 함께 양주에 남경을 건설할 것을 의논한 데 이어 그해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천도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윤관은 최사후 등과 함께 삼각산의 산세가 새 궁궐터로 마땅하다고 보고했다.


조선 세조와 닮은 고려 숙종의 즉위 과정조선 세조와 닮은 고려 숙종의 즉위 과정


숙종이 이와 같은 천도 계획은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부담감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즉위와 함께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이변이 일어났다. 숙종 원년(1096) 4월, 갑자기 서리와 우박이 쏟아진 데 이어 이듬해에는 후궁으로 물러나 있던 헌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이어 숙종이 가장 아끼던 둘째 아들 왕필마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러자 숙종은 상서롭지 못한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명분 아래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그 뒤 윤관은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등을 거치며, 숙종의 이력과 정치적 역량을 대외에 알리는 홍보사절의 역할을 충실히 해냄으로써 숙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해 별무반을 창설하다


숙종 9년(1104) 3월, 추밀원사로 동북행영도통사에 오른 윤관은 왕명을 받아 여진 정벌에 나섰다. 여진족은 원래 만주의 동쪽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으로 불리다가 송나라 때부터 여진으로 불렸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옛 땅에 자리 잡음으로써 우리나라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처음 고려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정착하게 하는 교린정책을 취했으나, 문종 34년(1080)에는 군사 3만을 파견하여 당시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던 여진족을 꺾어 놓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고려의 화전 양면정책에 따라 처음에는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숙종 때 동여진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북간도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했고, 그 뒤를 이은 우야소는 더욱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 부락을 공략하기에 일렀다. 이때 정주관(정평) 부근까지 진출한 우야소와 고려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보내 여진 정벌을 지시했다. 그러나 성격이 급하고 경솔했던 임간은 여진족을 얕잡아 보고 제대로 훈련도 되지 않은 군사들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역습을 당해 크게 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추밀원 별가 척준경의 활약으로 여진의 추격을 따돌리고 겨우 정주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자 숙종은 임간을 파직하고 윤관을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에 이면한 후 부월을 하사하며 여진 정벌을 명했다.


여진족 변발 풍습 변화여진족 변발 풍습 변화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윤관은 여진과 싸워 30여 명의 목을 베긴 했으나, 워낙 기동성이 뛰어난 여진에게 군사의 반을 잃는 패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이끌고 간 군사들 대부분이 죽고, 적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된 윤관은 임기응변으로 간신히 여진과 화친을 맺고 치욕적인 철수를 해야 했다. 연이은 두 차례의 패전으로 고려는 정주와 장성을 제외한 모든 여진 부락을 동여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첫 출전에서 패전의 치욕을 맛본 윤관은 여진을 정벌할 대책을 마련했다. 패전의 원인이 여진의 날랜 기병과 대적할 수 있는 군사가 없음에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에 맞설 수 있는 군사를 길러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먼저 윤관은 숙종에게 나아가 패전 사실을 아뢰었다.


"공자의 춘추에 따르면 임금이 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은 성상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성상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숙종 또한 굳게 믿었던 윤관이 대패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해 돌아온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때 패전의 죄를 물어 윤관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윤관의 충심을 익히 알고 있던 숙종은 대신들의 상소를 물리쳤다. 이때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과 대책을 내놓았다.


"저들은 원래 말을 타고 생활하는 족속으로 우리의 보병으로는 아무리 힘을 합쳐 싸워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신이 패한 까닭을 잘 알고 있으니 병력을 증강하고 기병을 양성하여 적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