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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 삼국사기에 누락된 아신왕 항복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1. 08:00

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 삼국사기에 누락된 아신왕 항복


다음카페 한사모에 올라왔던 댓글을 정리했습니다. 댓글치곤 예리한 부분이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제

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하며 무릎 꿇고 '이후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하였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끌려갔고, 이는 사실상 백제왕조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누락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다음 해 왜에 전지 태자를 볼모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하 댓글


댓글1.

"아리수를 건너 성을 찌르고 죄어 보내었다. □□소굴로 돌아가니 □편을 둘러쌌다. 백잔주가 죄임에 괴로워하여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나와 바치며 왕 앞에 꿇어앉아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로워 □헛갈리고 죄지은 것을 용서하였다. 적기로 그 후 따르며 성실하였다. 이에 얻기를 58성 700촌 데려가기를 잔주제와 대신 10인이니 군사를 되돌려 환도하다."


광개토왕비의 이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굳이 꼭 멸망했다고 보긴 힘듭니다. 조선 인조도 무릎 꿇고 제발 봐달라고 빌었으나 나라가 망하진 않았습니다.


중국 지안시의 광개토왕릉비


댓글2.

고구려는 주변 국가를 고구려 일부로 흡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공을 받으면서 속국 형식으로 국가를 유지시켜 준 경우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제도 그러한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한 나라의 군주로서 '노객이 되겠다'라는 표현에는 특정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는지?


고구려에 조공 바치던 국가의 군주는 고구려에 대해 '노객' 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더군요. 광개토태왕비에도 백제왕과 신라왕이 자신을 '노객' 이라 표현하고 있고, 중원고구려비에서도 앞뒤가 뜻은 잘려 알 수는 없으나 '노객인'(奴客人)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신라왕을 지칭하는지도.


댓글3

광개토대왕비를 보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어 말하니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가 무너지고 깨어지니 이에 백성이 노객이 되니 귀왕의 명을 청한다.’ "


이 경우의 奴客은 신라와 백제왕이 칭하던 奴客과는 별개로 떼어놓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신왕 광개토태왕 항복


백제, 신라왕이 1인칭의 奴客이라면 이 부분의 奴客은 절대로 1인칭이 아닌데, 노객奴客의 奴는 포로라는 뜻이 있으니 "백성이 노객이 되었다"는 부분은 왜인이 신라인들을 포로로 많이 잡았다는 뜻으로 봐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奴客이란 단어가 두 가지 이상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죠. 


허접한 결론은 奴客이 어떠한 문맥에 쓰였냐에 따라 다른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댓글4

비문에 기록된 왕과 고구려에 끌려갔다는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아신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보면요...


댓글5

그럼 삼국사기의 다른 왕 기록에 396년의 일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광개토태왕 대의 백제 왕은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이렇게 세 명이고, 396년의 백제왕은 아신왕이었으니 말입니다.


김부식 등이 저술한 삼국사기

댓글6

흐음...비문은 철저히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이므로 고구려인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어야 하지만.. 삼국사기는 삼국이 끝난 이후에 남겨진 기록입니다. 편찬자가(김부식 등이) 어떠한 서술 원칙에 의해 자료들을 정리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예를 들면 유교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상한 것은 삭제 혹은 변형, 뭐 이런 식으로요. 삼국사기에서 아예 비문 관련된 내용이 빠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왜 그런지를 이제 이해해야 하겠지만 말이죠.



댓글7

윗 토론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의견이기도 하겠습니다만 '모두루묘지명'에서도 '奴客'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고구려왕'에게 굴복한 아래의 사람들을 '노객'이라고 지칭한 것이 아닐까요??


댓글8

모두루묘지명에서도 '노객'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단순한 포로라는 의미를 넘어서 그 시대에는 관용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 고구려의 서울은 평양이다...라고 했을 때 서울을 일반 명사로 사용했을 때처럼)


다만 모두루묘지명의 '노객' 단어로 보아 '노객' 이 속국 군주만을 지칭했던 건 아닌 듯합니다.


고구려 모도루 묘지명 판본고구려 모도루 묘지명 판본


댓글9

고구려가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았던 것은 고구려 일부로 통합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요?


부여나 동예, 옥저의 경우 처음엔 조공국으로 대우하는 과정을 거쳐 완전히 통합했고, 예전 김용만 선생님의 말갈에 관한 글을 보면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의 전신은 옛 소국들인데, 그렇다면 이들 또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통합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사실 신라도 한동안 조공국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병합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 신라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군사가 몰살당하면서 기회를 놓쳤지만...어쨌든 백제와 신라도 완전흡수를 위한 과정의 하나로 위와 같은 상황이 전개된 것이 아닐지... 


댓글10

고구려가 실제로 신라 병합을 한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3년(481) 3월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신라의 7성을 함락시켰지만, 백제, 가야가 신라를 지원해서 고구려가 패퇴했다고 하네요.


북위 유연 송 토욕혼 돌궐 고구려 병립도


댓글11

광개토 태왕은 멸망을 시키기보다는 한민족 아래의 통합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묘인제도에도 백제인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댓글12

수묘인제도에 '백제인?' 태왕릉비에는 수묘인의 구성을 고구려의 원구성인인 구민(舊民)과 태왕의 정복활동으로 포로가 된 신래한예(新來韓穢)를 1:2의 비율로 구성한다고 쓰여 있습니다만 ..  이 신래한예가 구체적으로 백제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댓글13

태왕이 단순히 백제나 신라 그리고 가야지역을 완전 병합시키지 않고 굴복만 시킨 것은 북쪽에 아직 후연이나 거란 등 만만치 않은 세력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 만약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의 국가들 완전 병합을 노렸다면 엄청난 병력과 자원을 투입했을 텐데 그렇다면 거란, 후연 등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테고 그렇다면 고구려는 양쪽으로 적을 맞이하는 상황이 됩니다.


405년 아시아 정세


댓글14

그리고 백제는 기본적으로 국력이 강성했었죠. 거란은 고구려 영향권 안에 포함되지 않았었나요?

거란이 이탈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댓글15

제 생각에 거란이 고구려의 영향권에 포섭된 것은 광개토태왕 즉위년에 이루어졌던 거란 정벌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토대로 보자면 태왕 9년부터 태왕 15년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후연의 싸움은 누가 한쪽이 우세하다고는 볼 수 없는 서로 치열한 대결이 이어집니다.


이 6년간 후연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고구려는 5만의 대병력을 가야와 왜 세력을 떡실신 시키는 남방 정벌에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태왕 15년 기록을 끝으로 전쟁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그동안 후연과의 전쟁으로 인해 소모되었던 국력을 다시 재충전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고구려나 백제도 서로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습니다 (태왕 9년 이후에 해당하는 왕은 백제의 전지왕입니다.).


백제도 이 기간동안 왜와의 관계를 더 돈독히하는 것과 동시에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선 정비에 힘씁니다. 후연이나 남방정벌로 어느 정도 국력이 소모된 고구려로써는 상당히 요새화되었을 백제의 방어선을 굳이 공격하기는 힘들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백제로써도 고구려를 함부로 공격 못할 것이니 고구려로써도 그것을 바란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아신왕 광개토태왕


출처 - 한사모 : 백제 아신왕 대에... ...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누락(2007년 2월 25일)


ps. 상상력을 가미해 고구려 본기에 빠진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고려 초기에, 고구려의 사서가 대부분 소실된 상황입니다. 그래도 없는 기록이라도 모아 구삼국사를 만들었습니다. 동명왕편에서도 보이는 설화적인 내용이라도 일단 모아서 여차여차 추가를 했겠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1. 책을 만드는 관계자들이 서로 상충하는 부분은 믿을 수 없다 해서 누락 (고구려 기록 <-> 백제 기록)

2. 동명왕편에 나오듯, 지나칠 정도로 설화적인 표현들도 믿을 수 없다 해서 누락 (동명왕편의 내용이 현재 삼국사기엔 대부분 빠짐)

3. 애초부터 관련 기록이 없어서 못 적음


이 정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