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전쟁포로였던 조선인 일본군, 그리고 그의 아내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9. 28. 04:30

전쟁포로였던 조선인 일본군, 그리고 그의 아내


일제가 패망한 1947년.

당시 소련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를 포함한 각지 수용소의 일본군 전쟁포로 중 조선인(강제 징집된 젊은 청춘)들을 분리해 수용합니다. 전쟁이 끝났기에 전쟁포로 조선인들을 먼저 송환하려는 의도였고, 이에 따라 조선인 전쟁포로들은 여러 항구와 열차 인근의 집결지로 이동합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현대 크라스노야르스크 전경)


꾸준히, 그리고 산발적으로 북을 거쳐 남으로 송환되어오던 조선인 청년(전쟁포로였던 조선인 일본군)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선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나, 하나둘 돌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실제 송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름은 알 수 없는 김군의 일화처럼 슬픈 상황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김군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에서 출발해 고국으로 돌아오던 일본군 전쟁포로이자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기 전,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은 평범한 가장이었을 뿐입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에서 발췌하여 아래에 소개합니다.


크라스노야르스크는 몽골 서북쪽. 머나먼 그곳

(크라스노야르스크는 몽골 서북쪽. 머나먼 그곳)


==인용 시작==

이규철은 흥남여고 식당에서 배식 때 있었던 애절한 비극을 직접 목격했다. 그의 수기를 인용해보자.


식사 시간이 되면 전쟁포로 귀환자들은 식당 앞에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자리에 앉아 먹는다. 어느 날 점심때 이규철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밥을 퍼주고 있던 한 여인 곁으로 뛰어갔다. 그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아내였다. 남편의 느닷없는 출현에 여인은 기뻐하기는커녕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은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중순 결혼식을 올렸으나, 남자에게 바로 소집영장이 나와 생이별을 했다. 이규철은 남자의 이름을 다 밝히지 않고 김 군이라고만 썼다. 새신랑이 입대한 지 일주일 후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을 맞았다.


징병 징용으로 끌려갔던 청년들이 계속 돌아왔지만, 남편의 행방은 묘연했다.


일본군 만행

(전쟁포로를 학살하던 일본군)


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났어도 아무 소식이 없자 시부모는 아들이 숨졌다고 체념하고 며느리에게 개가할 것을 권유했다. 김아무개의 아내는 주위의 권유를 계속 뿌리치다가 억류자들이 돌아오기 보름 전에 재혼했다. 그리고 귀환자들을 접대하는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가 죽은 줄 알았던 남편과 마주친 것이다.


다음날 세 사람은 학교에서 만났다.


새 남편은 '원 남편'에게 비통한 표정으로 "처분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원 남편은 넋이 나간 듯 "이것이 내 운명인 것을... 부디 행복하기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은 그냥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기만 했다.


밤새도록 고민하던 여인은 끝내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김효순 지음, 서해문고

==인용 끝==


크라스노야르스크 여행

(시베리아 일대에서 3번째로 큰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


전쟁포로였던 조선인 일본군. 기구한 운명의 세 남녀가 전쟁 때문에 불행해졌던 일화입니다. 비단, 시베리아 포로였던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의 고난이 아닌, 전쟁을 겪은 모든 이들의 슬픔이 아닐지요.


흥남여고까지만 조선인 전쟁포로들을 송환했기에, 시베리아 전쟁포로들은 이후 3.8선을 거쳐 남으로 돌아와야 했고, 긴장감이 팽배했고 남북한 정부가 따로 성립된 와중에, 이분들은 고향 땅에서도 조차 경찰과 군인들의 의심을 받으며 몇 년간 살아야 했습니다.


이 일화를 보니 영화 진주만의 세 남녀도 생각이 나네요.


진짜 슬픈 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