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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 중요성과 대종교 신단실기, 환빠로 변질된 사상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30. 04:30

규원사화 중요성과 대종교 신단실기, 환빠로 변질된 사상


아랫글은 역사 21이란 사이트에서 무명이란 닉네임을 쓰시는 분의 글입니다.


규원사화의 중요성과 대종교와의 관계 (무명)

도대체 몇 대 단군이 몇 년 동안 재위했고 무슨 일을 몇 년도에 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요? 환빠들이 좋아하는 규원사화는 역대 단군의 이름이 나오는 최초의 사서(?)입니다.


(신단실기가 베낀 책) 그전, 허미수가 동사를 쓰면서 단군의 아들 부루와 부루가 도산에서 우임금이 제후 회의를 소집하자 회동했다(입조 했다)는 이야기를 씁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규원사화와 대종교의 관계가 아리송합니다.


삼국유사의 단군 이야기에서 한 단계 나간 거죠.

그리고 상 무정 8년에 단군이 죽었다고 구체적인 연도까지 기재합니다. 부루는 단군 즉위 15년에 낳았다고 씁니다. 물론 도산 회맹 이야기야 그 전에도 나온 겁니다만 여기 까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 수산집의 이종휘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갑니다. (한국 고전 종합 DB - 수산집 [클릭])


동사에 단군본기를 두게 되죠. 아마 신단실기를 지을 때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요. 예맥과 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했다는 팽오를 단군의 신하로 그리면서 치수사업을 했고 아들 부루를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 회맹에 보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부루 이후의 세보는 모두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다고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이 책(규원사화와 유사한 환빠의 책)은 1803년경 출판됩니다.


남인의 영수 허미수와 그가 세운 척주동해비[규원사화 단군기] 남인의 영수 허미수와 그가 세운 척주동해비

(출처 : 동해 메가쓰나미를 막아주는 허미수 비석)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도 마찬가지.


여기서는 구이의 땅에 순임금이 유주, 영주 2개 주를 설치했는데 동이에 속한다. 기자에게 단군조선 고지를 봉했다는 등 그러다가 1900년이 되면 상황은 갑자기 변합니다.


1904년 대종교의 김교헌(환빠)이 신단 민사를 쓰면서 이야기 투로 건국, 축성, 백성의 이동 등을 사실적으로 기록합니다만 물론 그 근거는 묘연합니다.


대종교와 신단실기 (다른 분의 글)

그다음 1907년 대종교가 생기고 민족주의자들이 대종교를 중심으로 집결하기도 한다. 그다음 1914년 신단실기가 나온다. 이때는 단군 아들 부루의 이야기에서 다시 좀 더 뻗어서 부루 형제가 9명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리고 단군이 구이를 교화시켰다는 이야기, 부루단지의 유래가 부루에서 나왔다는 이야기, 업주가리이야기 등이 첨가된다.

단군의 영토는 동으로는 대해(동해)까지, 남으로는 조령을 넘고, 서로는 요하를 넘고, 북으로는 흑수를 넘는다(東至大海 南踰鳥嶺 西遼河 北跨黑水)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환빠를 조금 옹호하자면, 이때는 그 필요성이 있었다. 민족 자체가 사라질 형편이니 ... 이때 신채호 등이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다음 갑자기 그동안 이종휘(신단실기를 지은)가 말한 것처럼 단군세가는 부루 이후에는 멸절되었는데 다시 기적처럼 부활한 것이다. 그 첫 단계가 바로 규원사화가 아닐까?


규원사화에서는 부루 다음 임검이 가륵이라고하고 을해년에 등극했다고 나온다. 다음 임금은 오사.. 그다음은 구을.... 좀 지나면 연표가 나온다.


단군 시기의 임금의 연표인데 1920년대 중반이면 정리되어 나오게 된다. (동사년표인가? 이름을 잊었음)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과 신단실기(神檀實記)[규원사화 단군기]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과 신단실기(神檀實記)

(출처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과 대종교)


좀 지나면 각 단군 임금기에 발명된 물품이 나열되는 악명 높은 단기고사가 나온다. 이 책은 너무 조악하여 재야 환빠들조차 별로 인용치 않으며 규원사화와 비교할 수도 없다. 이 책의 출판 연대는 1930년대 후반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해방 후가 되면 이런 책들을 토대로 별별 이상한 것들이 나오는데 발해에서 만들어진 책들이 나오고.. 너무 거짓이 심하여 오히려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책들이다. 모두 한 한문 하는 사람들이 장난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로 하는 이야기가 유교 쪽 사서가 아닌 암굴에 비장 된 것이라거나, 도가 계통의 사서라고 주장한다. 대종교 신단실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단서 대강이 나오는데 지금까지의 모든 근거 없는 단군 관계 글들을 모아서 중국의 고사와 연결하고 적당한 연도를 모두 붙여주게 된다. 이를 이어받아 드디어 한단고기가 그 화려한 마침표를 찍게 되는데... 그 연도는 1979년이다. 그 이후 얼토당토않은 책 몇 권이 더 있다.


원산에서 6.25 때 두고 온 책을 기억으로 되살렸다는 책(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시인 김지하가 약간 정신 이상한 소리도 하고)도 있고 몇몇 거짓 비서(무슨 결서하는 것)들도 있다. 


여기에서, 규원사화는 어떻게 해서 이런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갈망이 컸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규원사화의 표지 뒤를 유심히 보면 일제 때의 신문 조각이 희미하게 붙어있다)


규원사화 중요성과 대종교 신단실기, 환빠로 변질된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