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실상을 담은 매천야록 , 황현이 눈물을 흘리며 쓰다

서해문고의 오래된 책방 12번째 책은 황현의 매천야록입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서해문고에 항상 감사합니다.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황현의 절명 시 중 네 번째 구절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시대를 기록하는 데 필요한 문자와 그 문자를 아는 어느 누군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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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서, 누군가는 후세에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쓴다. 또 누군가는 욕망을 이뤄내기 위한 글을 쓴다. 다른 누군가는 욕망을 비난하기 위해 글을 쓴다.


매천야록.

이 책에는 욕망을 이뤄내기 위한 수단이자, 비이성적인 이들의 행위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쓰여있다.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은 1910년 국권 침탈이 이뤄지자 아편을 복용하고 세상을 떠난다. 글을 아는 인간이자 국가에 대한 충심이 크디큰 그에, 국권침탈이란 문자는 생명을 놓아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종래엔 한일합방이란 표현도 사용했으나, 이는 일본 측이 경술국치를 멋대로 해석한 낱말에 불과. 국권침탈 또는 경술국치가 옳은 표현)


고통을 안겨주든 문자를 알던 그에게 글 아는 사람 노릇이란 어떤 의미일까? 고통이 수반된 그 문자가 안경에 맺힐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에게 그 당시의 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고통과 쾌감, 환희와 슬픔, 분노와 냉정, 그가 남긴 매천야록의 글은 무엇일까?


☆ 우매한 임금, 간사한 왕비 그리고 편협한 어르신 한 분


고종은 친정을 시작한 이래로 매관매직을 멈추지 않았다. 민비는 정권을 잡은 이래로 국고를 거덜 내기로 작정한 듯, 과소비를 멈추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잡으면 편협한 사고로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적으로 삼았다.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 이야기 - 흥선대원군과 민비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 이야기 - 흥선대원군과 민비


이 무능한 이들의 한심한 정치 속에서 부정부패는 날로 심해졌고, 민 씨 일가의 배는 점점 더 불러왔으며, 고종의 뒷주머니도 마를 날이 없었다.


청나라 공사 서수붕이 말하길,


"본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 귀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삼십 년이나 되었는데도 제위가 아직 편안하니....."


이에 대한 고종의 반응은 꽤 유쾌했다.


"임금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유비의 아들 유선이 진나라 황제 앞에서 기분이 좋다고 웃어대던 일화가 생각난다. 망국의 군주가 그러하듯, 그의 곁엔 간사한 왕비인 민비가 있었다. 우매한 행위와 다른 이에 대한 반응만 다를 뿐, 우매하기론 마찬가지다. 드라마가 명성황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건 심각한 역사 왜곡이기도 하다. 매천야록의 민비는 간사한 망국의 주범 중 한 명일 뿐이다.


이처럼, 왕과 왕비가 이토록 우매하고 간사했음은 후대 사람들도 안타까워하는데, 동시대를 살았던 황현의 갑갑한 심정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 바람


요즘은 손끝에 닿는 바람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온이 많이 올랐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로 한 1910년 8월의 바람도 따뜻했을까?


동해와 남해에서 불어오는 왜놈의 바람. 서해를 넘어들어오는 청나라의 바람. 압록강과 두만강을 지나온 서구 열강의 바람까지, 그가 손끝으로 느끼던 바람은 온몸을 스쳐 가며 그에게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너의 나라는 이제 없다"


눈으로 읽어낸 글과 마음으로 읽어낸 글...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건 바람의 글이 아니었을까. 홀로 아편을 삼키던 그의 쓸쓸한 모습을 떠올려 본다. 마지막까지도 지워지지 않던 그의 마음속 글은 그가 견뎌내기엔 너무 무거웠다. 먼 곳에서 불어온 바람은 그에게 아련한 향수를 남기지 않았다. 고통과 절망의 끝자락에 다다른 그에겐 날이 우뚝 선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글이란 절망의 의미였다.


☆ 수많은 민란


충무공과 우암의 후손들마저도 탐욕에 빠진 구한 말. 작디작은 권력을 탐하려는 자들은 수많은 이들을 박해하고 괴롭혔다. 책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눠보면, 조선 왕조에 대한 분노의 민란과, 식민지배를 시작한 일제의 분노에 대한 민란이 존재한다. 민 씨 일가가 다시 집권하자 민중들이 대원군을 그리워했으나, 민씨 일가의 흉포함이 그 이유이지 대원군의 선행이 딱히 그리웠던 건 아니라는 기록처럼, 구한말의 민중들은 상하좌우가 모두 막혀 들끓는 분노를 표출할 시기만 조율했으리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고부와 남원에서 일어난 민란 등  팔도의 경계를 넘어온 괴로운 바람에 더해 조선 내부의 따가운 바람까지, 황현이 사랑하는 조선이란 국가는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음을 그에게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난을 일으킨 자들에 대해선 철저히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그의 글이란 건 나라에 반대해 난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가에 대한 적절한 비판도 멈추지 않았다.


조선 후기 민란 - 홍경래 철종 고종조선 후기 민란 - 홍경래 철종 고종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조국의 치부를 자꾸 들춰내어야 했던 심정은 어땠을까?


괴롭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가 남기려 했던 글은 조선에 대한 사랑이었으나, 그 시대엔 그런 글을 남길 수가 없었다. 글을 남기는 그가 괴로웠던 것. 조국에 대한 애증이 바로 그것이다.


☆ 친일파


많은 지면을 할애해 황현은 친일파들의 기행과 악행을 기록했다. 친일 행적이 뚜렷하지 않아도 일제의 위세에 눌려 한심한 일들을 벌이던 일화도 기록했다.

(대표적인 건 민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었음이 분명한데도 그들을 옹호하던 일화)


일진회의 윤시병과 송병준 등의 선언서

"나라가 위태롭고 망해 갈 조짐이 드러나니 공사와 대소를 막론하고 온 나라가 일본의 명령을 듣기 원한다"


이지용,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나는 오늘 최지천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아니면 나랏일을 누가 하겠는가"


이완용, 고종 앞에서 칼을 빼들며...

"폐하,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명성황후 오페라 - 정말 불편하다명성황후 오페라 - 정말 불편하다


청, 러시아, 일본이 조선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다 결국 일본이 승리했다. 이는 일본으로의 속국화 바람이 더 빨라진다는 의미였음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을 터, 매천야록의 기록이 간소화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이전보다 적고 간소화된 그의 글들... 을사늑약 이후, 황현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글을 심장 속에 남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결코, 본인이 원하진 않았지만, 타의 적으로 새겨진 심장의 글은 몇 곱절이나 더해진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려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그는 슬펐다. 슬프디슬픈 시대를 살았다. 그의 심장에 바람의 글이 쓰일 때, 그 고통이 그를 너무나도 비참한 슬픔에 빠지게 했다.


☆ 그가 남기고 싶었던 글


적어도, 지금의 매천야록에 남아있는 슬픈 글을 남기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남기고 싶었던 시대의 글이란 과연 무엇일까? 눈물을 흘리며 결심한 그의 뇌수에 적혀있던 글은 무엇일까? 한 톨, 또 한 톨, 그다음의 한 톨, 그리고 그다음의 한 톨까지, 눈물로 흐트러진 그의 초점에 맺힌 아편은 차라리 목숨을 연명하는 그 시간마저도 버리고픈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꼬부라져 힘이 없는 나뭇가지보다 나은 거 없는 나의 목구멍 뒤로 넘기는 그 순간, 숨이 차올라 고통스러운 시간이 나를 얼마간 지배할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슬픈 문자를 접한 그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글을 아는 그가 고통을 견딜 수 없는 화염으로 빠져들었다.


☆ 사랑합니다. 나의 조상이여...


매천이 남기고픈 글을 다시금 되뇌어본다. 구한말의 슬픈 시기를 보낸 그의 애국심을 누가 가늠치 못할까? 감히 내가 추측해 보건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픈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다.


"사랑한다. 나의 조선이여"


글을 아는 그가 슬픈 한 구절, 두 구절, 긴 어구를 만드는 그 과정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았겠나? 눈물로 기록을 남긴 그의 충혈된 눈이 떠오른다. 노년의 그가 좋지 않은 시력으로 많은 글을 보고 많은 글을 쓴 건, 더욱 나은 다음의 기록을 기대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의 군주가 조금 더 총명해져서, 나와 같은 백성들이 조금 더 밝은 희망을 품고 미래를 살아갈 희망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슬프디슬프다.


글을 아는 자로서, 이런 슬픈 글을 남기게 된 황현의 심정을 더듬어 보면 너무나도 슬프다. 그가 글을 쓰는 1분 1초의 순간에도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슬픈 기록의 역사다. 책을 완결짓지 못하고 세상을 뜰 정도로 그는 세간의 미련을 모두 버렸다. 눈물을 흘리던 노구의 황현이 떠오른다.


ps1.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떨리는 손을 얼마나 움켜잡으며 슬픈 문자를 적기 위해 울음을 참았을까. 매천 황현. 그의 슬픈 문자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심장에 이름 모를 두근거림을 남겨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ps2. 이렇게까지 감정이 이입되어 읽은 책은 오랜만인 듯.


매천야록 - 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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